
이어지는 내용

사실 최근에 조너선 스미스가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에 붙이는 주석에서 괴테의 식물 형태론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때 좀 황당했다.(<<Relating Religion>>의 2장을 참고할 것) 처음 듣는 괴테의 식물학 책도 신기했거니와 엘리아데가 직접 언급도 하지 않은 책을 <<형태론>>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이론으로 제시한 것도 낯설었다.
그런데 괴테의 이파리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다른 사상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 이야기가 조금 덜 낯설게 되었다. 그 사상가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받아들인 괴테를 통해서 엘리아데가 받아들인 괴테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더 나아가 ‘현상학’이라는 전통에 대해서도 전보다 이해하게 되었다.
![]() | 무교 - ![]() 최준식 지음/모시는사람들 |
“그러면 도대체 에로스는 무엇이란 말입니까?”“……그는 가사적인(죽을 수 있는) 것과 불사적인 것의 중간자라 할 수 있지요.”“디오티마여! 그 중간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소크라테스여! 그것은 위대한 정령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정령(daimon)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신과 가사적 존재의 중간자라 할 수 있답니다.”
달케(Paul Dahlke, 1865-1928)는 종교가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면 종교로서 불교를 정의할 때 불교가 ‘신 없는 종교’의 구조를 갖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달케는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단지 이 질문의 답이 실재로부터 주어질 수 없을 때 종교적 방편개념으로서 ‘신’이 필요한 것이다. 즉 인류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방편으로서 ‘신’ 개념이 필요하다는 게 달케의 주장이었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1719년에 출판되었다. 맥그레인은 이 소설에 나타난 타자와의 만남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크루소의 경우에 그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19세기 진화론적 인류학의 경우처럼 시간이 아니라 종교이다.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지리적 종교가, 직선적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 종교가 가로놓인 것이다. 크루소의 외딴 섬은 기독교적인 지리 내에 위치한다. 지구 표면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관심의 모눈이라는 위도와 경도 아래 존재한다.……
크루소가 보기에 ‘야만인’들은 벌거벗었고 자신은 옷을 입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총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영혼에 기독교로 무장하였다. 타자는 원시인(primitive)이 아니라 야만인(savage)이다. 기독교적인, 종교적인 인식 내에서 타자가 출현하는 것이다.……크루소에게 있어 야만인은 19세기처럼 역사의 시간에 근본적인 준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부재와 그에 따라 금수, 악마,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간 본성의 바닥상태에 근본적인 준거를 두는 것이다.[Bernard McGrane, <<Beyond Anthropology: Society and the Other>>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89), 51.]
19세기와 18세기의 타자 인식을 대조하면서, 18세기에 타자와 유럽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준거는 종교(기독교)의 유무라고 지적한 저자의 분석이 날카롭다. 18세기 유럽 독자들이 <<로빈슨 크루소>>에서 읽어낸 것도 바로 그러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수용의 자세가 1668년에 출판되어 18세기에는 다양한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읽혔던 <하멜 표류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관련된 내용은 하멜의 한국 종교 서술 참조) 이것은 카베사 데 베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응과도 통하는 것이리라. (카베사 데 베카 읽기)
<<로빈슨 크루소>>도 제대로 읽어보고 <<김씨 표류기>>도 보면, <<하멜 표류기>>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련만 요즘은 그럴 시간이 없다.
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이며 도덕적 의무는 종교에서 비롯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로버트슨 스미스는 한술 더 떠 종교의 기본적인 속성은 보수적이라고 선언한다. 이 대가의 말씀이 다소 노골적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은 거역하기 힘든 논리이기도 하다. 나중에 그 자신이 보수적인 교단에 의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
종교적 감정은 원래(naturally) 보수적이다. 종교는 오래된 관습이나 관례에 매어있기 때문이다. 신들은 전통적인 의례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고, 오랜 기간을 거쳐 확립된 행위 규범에 의해 신성함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신들은 항상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 같다.
W Robertson Smith, <<Lectures on the Religion of the Semites>>, 2nd ed. (London: Adam & Charles Black, 1894[1889]), 53.
훗날 로버트슨 스미스의 기본적인 입장을 받아들인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기능주의에서 받게 되는 비판이 이 점에 관한 것이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종교와 사회변동을 연관시켜 설명하는 데 취약하다고. 종교가 사회변동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사례들을 수도 없이 찾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속성’이 보수적이라는 지적을 뒤엎을만한 반론을 구성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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