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2 23:04

랜디스가 채록한 한국 동요 기독교세계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성공회 선교사 중 한 명인 랜디스는 인천 지역에서 병원과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고아들에게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동요를 채록하여 1898년 미국 저널에 발표하였다. 수록된 지면은 다음과 같다.
E. B. Landis, "Rhymes of Korean Children," The Journal of American Folklore 11-42 (1898): 203-09.

내가 랜디스가 의례를 중시하는 성공회 선교사이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과는 달리 의례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났을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그의 글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 동요는 내 관심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 동요 모음의 첫 두 노래가 (그가 성공회 사제로서 중시했으리라 생각하는) 의례와 사제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는 곡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왜 처음에 실렸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그의 스타일대로 건조하게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가 이 노래들에서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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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6 13:28

조선 사찰과 기생 독서: 메모

한 일본인이 1932에 쓴 조선 기생관광에 대한 책에서 사찰 이야기가 나온다. 사찰이 유흥의 장소로 사용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일인데, 일제강점기에는 기생 관광과 관련된 곳들도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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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2 07:16

요가와 혼합현상 기독교세계


1. <기독교사상> 2018년 2월호에 “한국 기독교의 혼합주의, 혼합현상”이라는 내 글이 실렸다. 편집장 선생님의 배려 덕이다. 나로서는 혼합주의 담론의 주무대 중 하나였던 유서 깊은 잡지에 그에 대한 다른 시각을 담은 내 글이 추가된 것에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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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12:01

세계종교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의 쟁점 세 가지 독서: 메모

저자들은 종교학 교육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세계종교 패러다임에 대한 최근 종교학계의 비판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잘 된 요약이어서, 나도 이번 방학 동안 이들이 요약한 세 가지 쟁점을 기준으로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할 예정이다.
Christopher R. Cotter & David G. Robertson, “Introduction,” After World Religions: Reconstructing Religious Studies (London: Routledge, 2016),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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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7 19:12

종교 아닌 것을 통해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 종교학공부

정진홍: (대학에서 종교를 가르친 경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불교, 기독교 등 전통적인 개개 종교를 거론하지 않고 종교를 이야기하면 학생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아데의 <종교양태론>을 읽으면서 제가 느꼈던 흥분이 상당히 보편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172)

저는 학생들에게 전통종교에 대한 ‘정보는 다른 곳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 여기에서는 종교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이야기 합니다.……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냐? 그런 종교를 ‘보는, 또는 겪는 어떤 다른 것’을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느끼고 있지 않느냐? 그 느낌이 무엇인가 구체화시켜 보자. 그 느낌을 가졌다면 당연하게 그걸 찾아봐야 할 것 아니냐? 그런 거죠.
학생들에게 종교적 가치나 가르침을 얼마만큼 비종교적 언어로 서술해서 전달할 수 있게 할까. 이게 종교 가르치는 사람들의 큰 과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종교언어의 소통 가능한 비종교언어화가 종교 가르치는 사람의 과제이고 종교언어와 비종교언어를 서로 넘나들  수 있어야 종교학자라고 생각합니다.(185-86)
“특별좌담회: 종교 가르치기”, <<종교문화비평>> 29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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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02:09

세계종교를 가르치는 신참 강사의 고민 독서: 메모

어떻게 신빙성 없는 이론과 역사의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 과목을 가르칠 수 있을까? 최근 연구에서 거듭해서 그에 반대되는 내용이 증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체계가 변별되는 역사와 경계를 지닌 개별 독립체라고 가정하는 과목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종교적’ 정체성과 ‘세계종교’ 그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세계종교 입문을 가르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간단한 답은 그런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전통적인 세계종교 수업을 하는 대신 종교적 정체성을 당연시하지 않으면서 수업을 할 것이다. 세계종교들만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세계종교 입문을 가르칠 것이다.
Tara Baldrick-Morrone, Michael Graziano and Brad Stoddard, “’Not a Task for Amateurs’: Graduate Instructors and Critical Theory in the World Religion Classroom,” Christopher R. Cotter & David G. Robertson (ed.), After World Religions: Reconstructing Religious Studies (London: Routledge, 2016),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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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6:22

한국 오순절교회에 대한 콕스와 몰트만의 논쟁 기독교세계

저명한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에 대해 논쟁한다. 그런데 매우 사소해 보이는 것 갖고 신경전을 벌인다. 몰트만은 2005년 논문에서 순복음교회 신학이 정통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입장이 ‘기독교 무교’ 따위를 언급한 하비 콕스와는 다르다고 넌지시 언급한다. 다음 해에 콕스가 반박하는 글을 발표한다. 순복음이 비정통적이라고 할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논쟁에는 묘한 대목이 있다. 서로 자기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대접을 잘 받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몰트만 글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고, 이에 대한 반론에서 콕스도 자기도 얼마나 대접을 잘 받았는지를 자랑하듯 말한다. 서울의 좋은 호텔에서 숙박하고 인천순복음교회에 초청되어 환영받은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자신의 책이 순복음교회에서 환영받았음을 말하기 위한 근거라는 것이다.
익숙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콕스의 책에서 순복음교회는 세계 오순절교회 운동의 한국 사례로서 등장한다. 순복음교회는 명실상부하게 국제적인 오순절교회 현상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몰트만은 한술 더 떠 순복음 신학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둘 다 이 교회가 기독교 정통신학임을 국제적인 차원에서 최고 수준의 학계 차원에서 공인한 작업이다. 교회 입장에서 이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전후 사정이나 선후관계는 알지 못하지만, 좋은 대접은 이 맥락에서 당연하다. 외국 학자들에게는 인상적이었을지는 몰라도 한국 종교계 맥락에서는 그랬겠거니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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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0 01:11

캔트웰 스미스, 세계종교 패러다임의 극복을 말하다 독서: 발제

James L. Cox, “Before the ‘After’ in ‘After World Religions’: Wilfred Cantwell Smith on 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 Christopher R. Cotter & David G. Robertson (ed.), <After World Religions: Reconstructing Religious Studies> (London: Routledge, 2016).

저자는 ‘세계종교’를 비판하는 현재의 논의에 도움을 주는 통찰을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고전적인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소개해준다. 캔트웰 스미스는 세계종교 패러다임 해체 논의의 선구자라는 저자의 평가에 수긍이 간다. 그의 공헌을 다음 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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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6 03:19

작가 달력 신변잡기

평범한 문장을 뱉어내는 것도 힘겨워 한 지 꽤 되었다. 해가 넘어가도 나는 여전히 써야했는데 못 쓴 글, 써야하는 글, 써야할 글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내가 뻔뻔하게도 나의 정체성, 즉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작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작년 한 해를 함께 한 알라딘 달력 때문이다. 이 달력은 여성 작가들의 사진과 그들의 어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일시하기에는 좀 이질감이 느껴지는 표현이 더 많긴 하지만 어떤 문장들은 마음에 와 닿고 심지어는 위로를 주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저런 강의를 하며 지냈고, 간간이 억지로 글을 쓰곤 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직업을 말한다면 시간강사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건 나를 규정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달력을 보면서 간간이 떠오른 것이다. ‘작가’라는 말은 요즘 유시민씨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타이틀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낯설었는데, 나도 따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글을 쓴다. 모아놓기 민망할 정도로 조잡하지만 글들이다. 작가 처럼 한 작품을 집필하는 것이 아니라, 발표문, 논문, 단상, 번역, 각종 기고문 등 흩어져 있는 글들을 무원칙하게 쓰고 있다. 심지어 사전 항목, 보고서, 제안서, 논평, 심사평 등 실무적인 글들도 어쨌거나 내가 쓰는 것들이다. 강의로 먹고 살긴 하지만, 결국 내가 생활하고 약간의 짬을 얻어 글을 읽는 것을 글을 쓰기 위함이다. 제대로 된 책의 저자는 아니지만, 결국을 글쓰기 위해 먹고 산다는 의미에서 나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요즘 글을 잘 쓴다는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실은 매우 반대이긴 하다. 블로그 글도 거의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글쓰기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꾸역꾸역이라도, 모으기 힘들 정도로 부스러진 형태들로 산출된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일은 결국 글 쓰는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작년 말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달력의 덕이다. 나이를 먹어도 글 쓰는 것은 수월해지지 않고, 나오는 대로 내지르는 뻔뻔함도 이상하게도 잘 길러지지 않는다. 1월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답답함 속에 살 것 같다. 하지만 빨리 쓰지도 못하는 잡글만 쓰고 있더라도, 어찌되어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생활이 정신없어도 남을 힘을 실어야할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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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00:54

아인슈타인의 종교론 독서: 발제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는 종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지론이 요약된 글로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Einstein on Cosmic Religion and Other Opinions and Aphorisms> (1931)

간단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소박하지만 ‘과학자의 종교’를 분명히 보여주는 글이다. 아마도 종교와 과학에 대한 지금의 논의에서도 과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료로서 빈번하게 인용되리라 예상된다. (예를 들어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비판하는 종교가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우주적 종교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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