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3 02:24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신변잡기

때론 짙타를 받기도 하지만, 나의 지론은 ‘사랑=소유욕’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전제를 깔고 있는 모든 연애 담론과 실천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 나에게 <<향연>>의 그리스 현인이 펼치는 사랑론이 좀 뜻밖의 것이어서 간단한 기록을 남긴다. 
에로스(사랑)에 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눈 후 책의 중간쯤부터 소크라테스가 끼어들어 자신 특유의 논리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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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16:42

다이몬, 신이 아닌 존재 독서: 메모

플라톤의 <<향연>>에서 ‘다이몬’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목을 만나다.
<<향연>>은 에로스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 중심으로 이루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소크라테스가 들은 디오티마의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테마에게 배운 것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에로스가 신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묻는다.

“그러면 도대체 에로스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는 가사적인(죽을 수 있는) 것과 불사적인 것의 중간자라 할 수 있지요.”
“디오티마여! 그 중간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크라테스여! 그것은 위대한 정령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정령(daimon)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신과 가사적 존재의 중간자라 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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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1 17:16

신, 궁극적 실재의 방편 독서: 메모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것”이라고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기독교 위주의 종교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의는 계속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식의 정의를 교정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이다. 
유럽의 불교인들은 서구적인 종교 개념의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독일의 불교”라는 김명희 선생님의 발표의 한 대목이다.

달케(Paul Dahlke, 1865-1928)는 종교가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면 종교로서 불교를 정의할 때 불교가 ‘신 없는 종교’의 구조를 갖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달케는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단지 이 질문의 답이 실재로부터 주어질 수 없을 때 종교적 방편개념으로서 ‘신’이 필요한 것이다. 즉 인류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방편으로서 ‘신’ 개념이 필요하다는 게 달케의 주장이었다.

독일 불교인 달케에 대해서는 이 글(이동호, “유럽불교의 개척자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편이다. 그는 종교는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다. 멋있는 표현이다. 신은 ‘저편’에 대한 하나의 상징, 불교적인 언어로는 방편이다. 저편은 ‘무한자’나 ‘궁극적 실재’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표현이다. 그의 설명 논리는 불교적인데, 여기엔 쉽게 거부하기 힘든 힘이 느껴진다.

2009/10/08 03:18

크루소의 종교 독서: 메모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1719년에 출판되었다. 맥그레인은 이 소설에 나타난 타자와의 만남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크루소의 경우에 그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19세기 진화론적 인류학의 경우처럼 시간이 아니라 종교이다.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지리적 종교가, 직선적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 종교가 가로놓인 것이다. 크루소의 외딴 섬은 기독교적인 지리 내에 위치한다. 지구 표면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관심의 모눈이라는 위도와 경도 아래 존재한다.……
크루소가 보기에 ‘야만인’들은 벌거벗었고 자신은 옷을 입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총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영혼에 기독교로 무장하였다. 타자는 원시인(primitive)이 아니라 야만인(savage)이다. 기독교적인, 종교적인 인식 내에서 타자가 출현하는 것이다.……크루소에게 있어 야만인은 19세기처럼 역사의 시간에 근본적인 준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부재와 그에 따라 금수, 악마,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간 본성의 바닥상태에 근본적인 준거를 두는 것이다.[Bernard McGrane, <<Beyond Anthropology: Society and the Other>>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89), 51.]

19세기와 18세기의 타자 인식을 대조하면서, 18세기에 타자와 유럽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준거는 종교(기독교)의 유무라고 지적한 저자의 분석이 날카롭다. 18세기 유럽 독자들이 <<로빈슨 크루소>>에서 읽어낸 것도 바로 그러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수용의 자세가 1668년에 출판되어 18세기에는 다양한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읽혔던 <하멜 표류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관련된 내용은 하멜의 한국 종교 서술 참조) 이것은 카베사 데 베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응과도 통하는 것이리라. (카베사 데 베카 읽기)
<<로빈슨 크루소>>도 제대로 읽어보고 <<김씨 표류기>>도 보면, <<하멜 표류기>>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련만 요즘은 그럴 시간이 없다.


2009/10/07 22:22

종교는 원래 보수적 독서: 메모

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이며 도덕적 의무는 종교에서 비롯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로버트슨 스미스는 한술 더 떠 종교의 기본적인 속성은 보수적이라고 선언한다. 이 대가의 말씀이 다소 노골적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은 거역하기 힘든 논리이기도 하다. 나중에 그 자신이 보수적인 교단에 의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

종교적 감정은 원래(naturally) 보수적이다. 종교는 오래된 관습이나 관례에 매어있기 때문이다. 신들은 전통적인 의례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고, 오랜 기간을 거쳐 확립된 행위 규범에 의해 신성함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신들은 항상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 같다.
W Robertson Smith,  <<Lectures on the Religion of the Semites>>, 2nd ed. (London: Adam & Charles Black, 1894[1889]), 53.

훗날 로버트슨 스미스의 기본적인 입장을 받아들인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기능주의에서 받게 되는 비판이 이 점에 관한 것이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종교와 사회변동을 연관시켜 설명하는 데 취약하다고. 종교가 사회변동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사례들을 수도 없이 찾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속성’이 보수적이라는 지적을 뒤엎을만한 반론을 구성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2009/10/07 03:29

종교 개념의 세번째 영역 종교학공부

얼마 전에 피터 바이어(Peter Beyer) 교수의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서구적인 종교 개념이 비서구사회에 적용된 과정을 개괄하는 강연이었는데 나에게 너무 익숙한 내용이어서 그런지 다소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가 청중들의 수준을 다소 낮게 설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돌같이 단단한 논의 전개는 인상적이었지만, 내용은 다소 평범해서, 도대체 그의 대표적인 이론 작업인 지구화(globalization)에 대한 논의가 종교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회의만 느낀 채 강연장을 떠났었다.
오늘 종교 개념에 대한 다음 논문을 읽고서 그의 학자로서의 저력을 느끼게 되었다. 최근 종교학자들의 종교개념 논쟁을 깊이 있게 정리하고 자신의 대안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글이다. 그의 대표작에 해당하는 글은 아니겠으나 그의 정연한 논리에서 배울 점이 많은 글. 내가 그에 대해 가진 생각이 ‘짧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Peter Beyer, "Conceptions of Religion: On Distinguishing Scientific, Theological, And" Official" Meanings," <<Social Compass>> 50-2 (2003): 141. 파일: Beyer_Conception_religio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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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3 08:28

종교로서의 애니미즘에 대한 불만족 기독교세계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회의 보고서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To consider missionary problems in relation to the non-christian world>> 제4권에는 애니미즘 종교를 다루는 장이 있다.(이 자료를 웹상에서 볼 수 있는 곳) 이 글에서 "종교로서의 애니미즘에 대한 불만족"이라는 소절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전통에 불만족을 갖고 있는 지식인 계층(전통적인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서구적 영향에 민감한 계층)의 이야기들을 모아놓고, 그것이 선교의 좋은 기회, 혹은 선교를 위한 자원이 됨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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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01:36

근대 종교 일러스트 몇 장 서랍2: 도상

1880~1910년대 영국 신문에 실린 한국에 대한 일러스트와 사진들을 모은, <<세밀한 일러스트와 희귀 사진으로 본 근대 조선>>(살림, 2008)이라는 예쁜 책에서 종교에 관한 그림 몇 장을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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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01:29

평화를 위해 대화하던 자리 돌아다니다가

지난주 서울에서는 제5차 아셈 종교간 대화(The Fifth ASEM Interfaith Dialogue)라는 행사가 열렸다.(행사 개최에 대한 정보는 기사 “제5차 ASEM 종교간대화 개최”, 결과에 대해서는 기사 “'ASEM 종교간대화' 서울 선언문 채택”을 참조할 것.)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하는 모임치고는 좀 특별한 점은, 종교인들이 추축이 되기보다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이 꽤 들어있는 어정쩡한 구성을 취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모여 대화한 결론 역시 어정쩡할 수밖에 없다. 세계 평화를 위해 종교들이 함께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상호 이해’라는 추상적인 언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종교의 이상적인 언어들과 외교무대의 예의바른 언어들의 결합! 그 결합이 빚어내는 결과는 상투성과 불투명성이 점철된 선언일 뿐.

이런 모임이 효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이런 모임의 효용은 그들의 선언 내용보다는 그들이 실제로 만나 이야기했다는 ‘물리적인 만남’, 그들이 한국의 종교 시설을 방문하고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물리적인 만남’에 존재한다. 한 발표자 이야기했듯이 종교간의 대화는 어떤 작은 일을 함께 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지 공동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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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03:01

생활난의 원인을 말해주는 창세기 독서: 메모

일본 그리스도인과 ‘생활’이라는 특이한 주제에 끌려 들어갔던 열린 발표회. 일본 여성 근대교육가로서 유명한(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하니 모토코(羽仁もと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계부라든지, 가정잡지, 교육 등 다소 독특하면서도 우리 생활과 무관하지 느껴지지 않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타이트’한 생활 관념이 기독교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

발표자는 하니 모토코의 신앙이 ‘독특하다’고 표현하였는데, 그 독특함은 창세기에 대한 그녀의 독창적인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가 창세기에서 읽어내는 주제는 ‘진보를 위한 싸움’이다. 그녀에 따르면 태초에 아담과 이브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영성의 눈을 떠서 자신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중에 사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고민하고 “하느님 아버지가 그들에게 어떠한 것을 바라고 계신가를 모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활이 ‘틀’에 갇혀서 긴장감을 잃어버렸고, 그 결과가 선악과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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