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8 03:26

'한성부 지도'에서 찾아본 종교 건물들 서랍2: 도상

근대(1900년 경)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인 <한성부지도>는 게일의 다음 글을 통해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 지도에는 일제에 의해 변화를 겪기 전의 서울의 지형이 간직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개항 이후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어, 미국,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의 대사관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James Scarth Gale, "Han-Yang(Seoul),"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2-2 (1901):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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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 03:32

마나로서 지녀진 예수 독서: 메모

필요한 부분이 있어 선생님의 옛 글을 찾아보았다.
정진홍, “토템과 마나의 예수”, <<기독교사상>> 217호(1976년 7월): 54-58. (이 글은 후에 <<한국 종교문화의 전개>>(1986)에 수록된다.)  파일: Totem_Mana_Jesus.pdf

종교학 용어 셋을 인상적으로 사용해서 한국의 예수 이미지가 정립되지 않았음을 비판하는 글이다. “교회 안에서 토템이 되어버린 예수상, 신학에 의해서 터부가 된 예수상, 그리고 신도들에 의하여 마나로 화해진 예수상”(58)이 그 내용이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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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 01:53

신도시 교회의 입지 기독교세계

신도시 주변 개신교회 건축을 분석한 이정구의 글에서는 교회 입지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1) 최근 축조된 대부분의 대형 교회들은 외형이나 건축  재료, 규모 면에서 입지의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축조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교회들이 신도시가 형성되는 과정 중에 지가(地價)가 급등하기 전에 종교 부지 용도로 매입한 경우다. 이렇게 매입한 땅은 대부분 거주지보다 지가가 낮은 논과 산, 밭으로 거주지와는 일정한 거리에 있다.
2) 신도시에 건립한 몇몇 대형 교회는 거주 지역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 지역사회 및 주민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지금은 거주 지역과 상업 지역이 확장도어 건립 당시보다는 주민들의 동선이 좁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주 지역과 먼 거리에 있어서 자동차 없이는 교회 출석이 어려운 상황이다. 신도시 초기 입주민들은 주변의 논 한가운데와 산등성이에 있는 이러한 대형 교회를 ‘특정 신앙인들의 이기적인 집단공동체’라고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이며 변할 수 없는 교회론의 보편적인 본질에 반하여 지역성보다는 팽창주의에 본질을 둔 교회론을 근간으로 축조되었다.
[이정구, “한국교회 건축의 과거, 현재, 미래”, <<한국교회 건축과 기독교 미술 탐사>>(동연, 20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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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7:00

부산 헌책방의 "바가바드 기타" 종교학공부

그저께 ‘함석헌의 종교’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한국기독교가 낳은 예외적으로 풍성한 텍스트인 함석헌과 그에 대한 종교학적인 독해가 만난 의미 있는 자리였다. 그날의 좋은 발표들을 듣던 중 내 마음을 찌릿하게 울린 대목은 예기치 못했던 세부적인 부분이었다. 함석헌은 <<바가바드 기타>>의 주해를 통해 그 특유의 기독교 사상의 폭을 넓힌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1950년 부산의 헌책방에서 <<기타>>를 구해 읽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발표문에의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에 하루는 헌책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기타가 한 권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바가바드기타>>, 함석헌 주석, <<함석헌 전집>> 13권(한길사, 198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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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18:47

감염된 언어, 감염된 종교 종교학공부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저항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워낙 깔끔한 문체와 유려한 논리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은 내가 종교 영역에서 혼합현상(syncretism)에 대한 논문을 썼을 때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땐 내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겨웠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풀어내는 것은 고도의 글쓰기 능력이다. 그때 이 분의 글을 읽었다면 흉내라도 낼 수 있었을 것을.
나는 종교학(사실상 신학)에서 ‘혼합주의’에 쏟아지는 욕설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혼합현상’으로 고쳐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어학에서 크레올화(-化, creolization)라는 예를 가져와서 설명에 보태기도 하였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어를 둘러싼 논쟁에 순수/깨끗함의 추구라는 문제가 존재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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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13:39

괴테의 이파리, 벤야민과 엘리아데의 현상학 독서: 익힘

사실 최근에 조너선 스미스가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에 붙이는 주석에서 괴테의 식물 형태론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때 좀 황당했다.(<<Relating Religion>>의 2장을 참고할 것) 처음 듣는 괴테의 식물학 책도 신기했거니와 엘리아데가 직접 언급도 하지 않은 책을 <<형태론>>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이론으로 제시한 것도 낯설었다.

그런데 괴테의 이파리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다른 사상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 이야기가 조금 덜 낯설게 되었다. 그 사상가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받아들인 괴테를 통해서 엘리아데가 받아들인 괴테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더 나아가 ‘현상학’이라는 전통에 대해서도 전보다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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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9 14:57

한풀이를 넘어선 책이 되었으면 독서: 익힘

최준식 선생님은 대중적으로 호소력 있는 문체로 종교학의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책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몇 안 되는 종교학자 중 하나이다(독보적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분이 종교학계의 (김용옥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준만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파급력이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무교 - 6점
최준식 지음/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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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3 02:24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신변잡기

때론 짙타를 받기도 하지만, 나의 지론은 ‘사랑=소유욕’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전제를 깔고 있는 모든 연애 담론과 실천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 나에게 <<향연>>의 그리스 현인이 펼치는 사랑론이 좀 뜻밖의 것이어서 간단한 기록을 남긴다. 
에로스(사랑)에 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눈 후 책의 중간쯤부터 소크라테스가 끼어들어 자신 특유의 논리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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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16:42

다이몬, 신이 아닌 존재 독서: 메모

플라톤의 <<향연>>에서 ‘다이몬’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목을 만나다.
<<향연>>은 에로스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 중심으로 이루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소크라테스가 들은 디오티마의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테마에게 배운 것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에로스가 신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묻는다.

“그러면 도대체 에로스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는 가사적인(죽을 수 있는) 것과 불사적인 것의 중간자라 할 수 있지요.”
“디오티마여! 그 중간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크라테스여! 그것은 위대한 정령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정령(daimon)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신과 가사적 존재의 중간자라 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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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1 17:16

신, 궁극적 실재의 방편 독서: 메모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것”이라고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기독교 위주의 종교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의는 계속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식의 정의를 교정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이다. 
유럽의 불교인들은 서구적인 종교 개념의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독일의 불교”라는 김명희 선생님의 발표의 한 대목이다.

달케(Paul Dahlke, 1865-1928)는 종교가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면 종교로서 불교를 정의할 때 불교가 ‘신 없는 종교’의 구조를 갖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달케는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단지 이 질문의 답이 실재로부터 주어질 수 없을 때 종교적 방편개념으로서 ‘신’이 필요한 것이다. 즉 인류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방편으로서 ‘신’ 개념이 필요하다는 게 달케의 주장이었다.

독일 불교인 달케에 대해서는 이 글(이동호, “유럽불교의 개척자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편이다. 그는 종교는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다. 멋있는 표현이다. 신은 ‘저편’에 대한 하나의 상징, 불교적인 언어로는 방편이다. 저편은 ‘무한자’나 ‘궁극적 실재’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표현이다. 그의 설명 논리는 불교적인데, 여기엔 쉽게 거부하기 힘든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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