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5 13:10

전씨 아주머니 이야기 독서: 익힘

한국 무당과 여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인류학자 로렐 켄달(Laurel Kendall)의 최근 글은 한국 무속과 종교 정의의 관계 문제를 제기한다.[Laurel Kendall, "Korean  Shamans and Defining 'Religion': A View from the Grass Roots," in Jacob K. Olupona (ed.), <<Beyond Primitivism>> (London: Routledge, 2004).] 
켄달이 전해주는 전씨 아주머니(Auntie Chun)의 이야기, 이것이 글의 중심적인 소재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보편적이고 덕을 강조하지만, 무속은 그런 식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요. 이건 무당의 지위 때문이에요. 별로 배우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기적(miracle)은 무당에게 많이 일어나죠. 불교나 기독교보다 더요.……기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죠. 하지만 종교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거에요. 우리 무속은 이런 데 약해요. 우리에겐 진짜 기적과 신내림은 있지만, 무당들의 교육 수준이 낮거든요. 그게 실생활을 구원하는 데 연결되어야 하는데 너무 신령만 강조하죠. 내 말은 기적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에요. 물론 기적은 항상 있는 거지만, 무당들이 단골들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할 만큼 교육 수준이 되어있지 않아요. 기적을 통해 도와주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무속에는 체계적인  것이 없어요.
(247, 우리말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중역의 과정에서 원래의 내용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특히 ‘기적’은 무속인의 원래 이야기에서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1. 우리사회에서 ‘미신’으로 무시 받아온 무속인들의 한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무당이 염원하는 조직화, 체계화, 교육 등이 반드시 ‘종교’의 정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분명 그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고, 켄달은 이것을 종교 문제로 한정해서 논의를 이끈다. 켄달이 지적한대로 켄달과 무당은 종교에 대해 재미있는 입장 차이를 보인다. 켄달은 미국 학계에서 한국의 무속을 설명하면서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서구적인 종교 개념을 적용한다면 무속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고 강조하는 입장이고, 전씨 아주머니는 무속이 ‘종교’의 꼴을 갖추지 못해 무시를 당한다고 한탄한다. 종교에 대한 불편함과 종교에 대한 갈망이 대립하는 형편이다.(247-48) 
내가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종교’라는 대상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그 무속이 중심적인 현상이 되었다는 논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무속이 종교에 속하지 못해 설움을 겪은 이야기이다.  시대의 차이에 따라 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담론의 형성 과정과 그 영향이 이렇게 상반된다는 점은 내가 그 동안 묻어두고 있었던 측면인데, 앞으로 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2. 켄달이 이 글에서 하는 것은 전씨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켄달은 이 이야기를 종교 개념이 수용된 한국 근대사 안에 위치시킨다. 기독교적 종교 모델이 한국 사회에 수용되고, 또 그 모델이 ‘미신타파’에 사용된 과정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면서 전씨 아주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사연을 이해시킨다. 
또한 켄달은 이 이야기를 종교학자들의 논의 속에 위치시킨다. 서구적 종교 개념의 형성 과정(켄트웰 스미스)을 통해 왜 그것이 한국에서 ‘맞지 않는지’를 이해하고, 토착 계보학(local genealogy)을 추적하는 작업의 중요성(코마로프)에 공감하면서 한국을 그 사례로 추가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책에 참여한 저자들과 대화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전씨 이야기를 토착 전통과 세계 종교간의 만남을 보여주는 ‘세밀한 이야기’(micro-narrative)로 본다든지(브루스 링컨), ‘변화하는 연속성의 흐름’(카렌 브라운)에서 파악하는 데 동의하는 것이 대화의 예들이다.
아마 전씨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무당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세계 여러 곳의 ‘종교’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종교학자들의 대화에 이야깃거리로 참여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대화는 아직 그렇게 많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대화를 열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켄달의 이 작은 글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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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학 벌레 : 종교 개념의 세번째 영역 2009-10-07 03:29:19 #

    ... 수 있다.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무교/무속이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특히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미신 취급을 받았던 예도 공공의 영역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전씨 아주머니 이야기) 전에 내가 종교 개념에 대해 쓴 어설픈 논문에서는, 논문을 여는 부분에서는 공공의 종교 개념에 대한 사례들을 늘어놓고, 본문에서는 학문적 개념에 대한 고민을 전개했 ... more

덧글

  • 히읗 2009/09/15 13:40 # 답글

    그런 생각이 듭디다, 무당은 대개 무식하기 때문에 기적이 잘 일어난다고요. 기적 사건이 생길 때 유식한 사람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아도 무식한 이는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적이 무수하게 생기는 것이라고 보면 어떨지요......무식한 이는 자기가 상상한 것을 실제로 `연기'하면서 죽은이와 한몸이 되거나 죽은이와 대화를 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지요.
  • 히읗 2009/09/15 13:42 # 답글

    그렇다고 해서 기적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저도 먼 데 사건을 여기 멀리서 안 적도 좀 있으니까요......직관 같은 것, 천리안 같은 것......
  • 房家 2009/09/16 02:27 #

    히읗님 특유의 계몽주의적인 종교관을 오랜만에 만나네요. 그러면서도 유연한 모습도 보여주시고...
    님 말씀대로 우리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 속의 신비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거니까요. 과학이 설명해주는 영역에서는 대부분의 기적이 추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단순히 무지에서 나온 맹목적인 믿음은 자연스럽게 생명력을 잃어간다고 봅니다.
    다만 삶 속의 신비, 설명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기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재료는 무궁하죠. 그런 영역에서 계속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변함이 없을 거에요.
  • 2009/09/16 13:32 # 삭제 답글

    방형. 전씨 아주머니의 얘기가 막스 베버의 종교/주술(마술) 구분짓는 거랑 너무 흡사하네요. 베버(주의자)는, 종교상품 (요건 브루디외 용어) 공급자가 신도와 일대일로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고 답례를 받는 종교 행위는 "마술"로 규정하고 "종교"와 철저히 구분짓지요. "종교"는 종교공급자를 중심으로 "회중"이 형성되었을 때라야 비로서 등장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계층화 (종교 엘리트와 일반 신도간의 종교적 권위 관계), 합리화 (교리, 전례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 등의 과정이 동반되기 마련이라면서요. (어찌보면 베버도 서구의 전통적인 종교 개념을 받아들이고 하는 얘기겠죠)

    그런데 전씨 아주머니는 "단골들"에게 단발적인 "기적"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을 "실생활에서의 구원" 및 "올바른 길로 인도"할 필요성을 얘기하고 있는데, 베버식으로 보자면 이분이 일종의 거래로서의 주술을 윤리화된 종교의 형태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고 할수 있겠네요. 이 열망이 회중을 구성하고, 조직을 체계화하고 무속적 "신학"을 정립하려는 시도들로 이어진다면 새로운 종교가 출현할 수도 있겠구요. 뭐 사실 수많은 신종교들의 창시자들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닥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기적"을 내세워서 전씨 아주머니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네요. "합리성"이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pariah religion도 있는 걸테고), 무속인의 (세상 기준에서의)"무식함"이 한국 사회에서 무속이 하나의 "종교"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닐 것 같아요.

    그나저나 한국 사회에서 무속이 하나의 "종교"로서 대접받지 못한고 있다라는 판단 자체가 재미있네요. 무속인들의 연합이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이런 판단은 이분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거겠죠? 개별 무속인과 단골들 간의 간헐적이고 단발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무속"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고 외부의 편견어린 시선에 resentment를 갖고 있다는 거. 체계화된 교리와 전례가 없는 상태에서도 (서구적 기준으로 보는 거겠죠 이건) 무언가를 매개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거. 그리고 그 매개가 전근대화 시절의 마을사회 단위의 공동체 의식도 아닌 뭔가 다른 거라는 거. 이런 공동체 의식은 결국 외부에서 만들어진 담론이 내면화되서 생겨나는 거라고 봐야하는 건지.... (아 이건.. 혼자말입니다요)

    형... 항상 많이 배워요. 형처럼 좋은 글 다량 생산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죠?
  • 房家 2009/09/16 17:24 #

    베버가 종교/주술을 그런 식으로 구분했구나... 하나 배웠다. 뒤르케임과 매우 유사한 종교/주술 구분(이건 로버트슨 스미스로부터 뒤르케임이 배운 것이면서 미처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을 베버도 공유하고 있었군.
    아주머니가 종교의 '합리화'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삼이 말한 것처럼 그 언어가 치밀하지는 못해. 나름대로 신도의 범주가 있고, 무속인들끼리의 느슨한 조직(경신연합)도 없는 것은 아니니.하지만 아주머니가 말하는 조직, 체계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거고, 그러고 보면 이 언어가 엄밀하지 못한 것에는 사회적 편견의 탓이 있어. 교육 기관을 통해 무속인을 재생산하고 체계적으로 신도 조직을 관리하는 등, 베버가 말한 "관료화"를 거치고 무속이 본래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는지는, 아주머니는 별로 걱정을 안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물론 걱정이 되지.
    그런데 이런 합리화의 열망도 이젠 지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어. 그러니까 7,80년대 산업사회화 과정에서 생겼던 열망인데, 영적인 문화가 각광받는 21세기에는 "교회를 만드는 것" 말고 다른 살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 2009/09/18 14:36 # 삭제 답글

    스미스-뒤르케임 라인도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군요. (어이쿠... 시험 준비하는 중인데, 요쪽으로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으니,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겠어요) 사회학의 틀을 잡아놓은 두 거장 베버와 뒤르케임이 각기 자기의 저작들에서 서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건 사회학에서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인데 (거의 동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요렇게 공유하는 부분이 있네요.

    "영적인 문화가 각광받는 21세기에" 제도적인 틀을 만드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을 거라는 지적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도적 "교회"의 틀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 (일정한 세속화 과정을 거쳐서) 약화되고, 그로부터 해방된 종교소비자들이 종교 서비스를 누리는데 점점 더 주도권을 갖게 될 경우, 다른 종교 공급자들과 상호 공존하는 상태에서 무속이 갖는 지분이 좀더 늘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고 들어온 건 기독교 복음와 더불어 "종교"와 "종교적 정체성"이라 했을 때, 이 담론이 힘을 잃게 될 때 여러 다양한 형태의 종교문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겠죠.

    그나저나 한국에 들어왔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유불도가 아니라 무속을 주경쟁자로 삼았다는 사실이 재미있군요. 이건 다시 말해 선교의 주대상이 (초기 중국 예수회 선교사들의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선교방식과는 다르게)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사회 기층 민중 혹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 (여성...)이었다는 얘기인데... 이런 "아래로부터 위로"의 선교 방식이 선교사들의 (중국/일본 등지에서의) 축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온건지, 아니면 조선시대 사회 구조가 선교사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이런 방식을 채택하게끔 한건지 궁금하네요.
  • 房家 2009/09/18 17:40 #

    스미스-뒤르케임의 관계에 대해서는 메리 더글라스의 <<Purity and Danger>> 1장을 보면 잘 나와있음. 내 생각에 뒤르케임과 베버가 공유하는 이론적 원천은 19세기말 성서학자들의 논의야. 스미스는 벨하우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성서학자이고, 베버는 독일의 성서학 전통에 익숙한 사람이니까.
    개신교 선교사들은 비유교적이고 반불교적인 입장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는데(유교는 도덕 체계일 뿐이고, 불교는 힘이 다한 종교), 이런 태도에는 동아시아에서 축적된 경험(예수회 계열의 경험이 아니라 그에 반대하는 세력[여기엔 중국 개신교 선교사도 포함]의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고 봐. 하지만 이렇게간단히 정리될 수 없는 게, 존 로스를 통해서 친유교적인 입장도 들어오게 되고...
    어쨌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중 전통에 직면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은 삼군의 말대로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생각됨.
  • 변가 2009/11/02 14:21 # 삭제 답글

    '위치시킨다'가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혹 '정립'의 개념인가요?
  • 房家 2009/11/02 14:36 #

    그렇군요. 자연스러운 우리말 어감은 아니겠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포지셔닝(positioning)한다는 걸 그대로 옮긴 겁니다. 책에 나온 표현은 아니고 생각나는대로 적은 것입니다. 학문적인 논의라는 맥락 안에 이 이야기를 하나의 사례로서 등장시킨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도 학자의 책에 나오는 사례로 등장하면 영향력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위의 경우에는 영미권 학자들이 '한국종교'라는 것을 서술할 때 참조하는 레퍼런스의 위치로 이 이야기가 들어가는 걸 의미합니다.(영미권 학자들이 한국종교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그래서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재료로 논의할 수 있는 자원은 지금도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떠한 맥락 안에 놓음으로써 새로운(혹은 숨겨진) 의미나 가치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의도해서 쓴 표현입니다. '정립'(바르게 세운다)은 현재 상태가 바르지 못하다는 다소 가치 판단이 들어간 말일 수 있는데, 그래서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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