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9 22:40

[번역]2장, 요셉의 기도 서랍1: 문서

현재 번역 작업 중인 글. 조너선 스미스의 <<Map is not Territory>>의 2장, "요셉의 기도". 워낙 전문적인 글이라 읽을 사람들이 있을 지 심히 의심스러운 글이다.(이 책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 2장이 그렇다는 이야기) "요셉의 기도"라는, 인용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유대교 문서(외경)을 통해서 당시 지중해 종교의 '하강 신화'하는 주제까지 폭을 넓혀 이해하려는 시도. 앞부분에 얼핏 보기에는 신학적인 문헌 작업에 매여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결국에는 확장된 주제를 손대는 스미스 특유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공동작업이라 올해 안으로 책이 나올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제2장 요셉의 기도



사해 지역과 나그함마디(Nag-hammadi)에서 있었던 발견, 그리고 굿이넙(E. R. Goodenough)에 의해 능숙하게 조사된 헬레니즘 유대교 유적의 발견으로 인해 비정경(非正經) 문헌들에 때한 새로운 관심이 촉발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헤네케와 슈니멜셔의 <<신약 외경(Neutestamentliche Apokryphen)>>의 범위 내에서 비교 가능한 유대교와 유대 기독교의 외경 문헌들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긴요한 일이 되었다. 이 문헌들 대부분에 대한 학문적 검토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오리게네스(Origen)가 <요셉의 기도(The Prayer of Joseph)>(프로세우케 요세프[Προσευχή Ίωσήφ])라는 제목으로 인용한 유대교 외경의 단편에 대해서도 검토가 부족했다.

[<요셉의 기도>에서] 주가 되는 단편A는 오리게네스의 표준 편집판에서 <<요한복음 주석(Comm. in Ioann.)>> 2권 31장에 보존되어 있으며, 8개의 마침표를 포함한 15행 정도의 그리스어로 이루어져 있다. 부가적인 단편B는 <<필론칼리아(Philocalia)>> 22권 15장에 있으며 오직 한 행만이 추가되어 있다. 니케포루스(Nicephorus)의 <<행분법(Stichometry)>>에서 <요셉의 기도>가 1100행(stichoi)을 포함한다고 이야기한 것에 비추어볼 때, 단편들의 내용은 전체 저작의 단편에 해당될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적은 분량이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저작에 대한 증언들이 드물고 이것을 인용하는 경우가 더 드물다는 사실 때문에 이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나 그 중요성이 퇴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텍스트가 말해주는 전설은 독특하다. 이 독특성과 이 외경의 연대와 출처를 확정짓는 문제 때문에 이 텍스트의 해석은 극단적으로 어렵다. 이 논문의 범위에서 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할 수밖에 없다. 차후에 상세한 주석을 출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남아있는 텍스트는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특히 <창세기> 32: 24이하)에 대한 미드라쉬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희년서(Jubilees)>, <<(필론 위서)성서의 고대성(Biblicarum antiquitatum)>>, 복잡한 증언 문헌들,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으로 대표되는 확립된 문헌전승 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텍스트는 특히 칠십인역 <창세기> 48-49장과 명백한 언어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임스(M. R. James)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은 야곱의 유언을 담고 있고, 우리는 그 일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요셉과 그의 아들 에브라임(Ephraim)과 므낫세(Manasseh)에게 말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물론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빈약하다. (a)우리는 이미 <창세기> 49장에서 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유언을 찾을 수 있다. (b)<창세기> 48장에 요셉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들과 단어의 사용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세우케 요세프’(Προσευχή Ίωσήφ)라는 제목을 설명해주지 못한다.(<창세기> 48: 18, 50: 5, 50: 25의 기도의 맥락에서 요셉이 언급되기는 한다.) 우리는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 제목이 ‘프로세우케 요세프’(Προσευχή Ίωσήφ)일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아있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가질 수 있으며, “이 책은 요셉에 의해 발언된 많은 양의 기도나 기도들을 포함하는 것이 틀림없다.(<아스낫(Asenath)>이 아스낫의 긴 기도를 포함하고 있듯이) 구덩이에서인지 감옥에서인지, 아니면 임종 때인지 어떤 경우에서 이야기되었는지 확실한 것이 없다.”고 제임스가 가정한 것도 상당히 옳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요셉의 기도>는, 보통 제목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족장이 죽는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말을 하는 이가 [바로] 이전 족장인(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증언 문헌들의 매우 일관된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한 배경에서 [이 텍스트가] 천상의 인물로서 야곱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 외에도 <창세기> 48-50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로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단편A(오리게네스, <<요한복음 주석>> 2권 31장)

현재 히브리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요셉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은 외경을 받아들인다면,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즉) 태초부터 인간에 비해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 다른 존재들보다 훨씬 뛰어난 그들은, 천사의 본성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으로 하강하였다. 아무튼 야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나 야곱은 또한 이스라엘, 하느님의 천사, 지배하는 영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다른 창조 작업 이전에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야곱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이스라엘인 나 야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즉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라고 불러주신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 중에서 처음으로 난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내가 시리아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올라오고 있을 때, 하느님의 천사 우리엘(Uriel)이 등장해서 내가 지상으로 하강하였고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장막을 치고 거하였고 내가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그의 이름과 모든 천사 이전의 그의 이름이 나의 이름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나와 겨루고 나와 싸우며 나와 씨름하였다. 나는 그의 이름과 그가 하느님의 아들 중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너는 나보다 여덟 번째나 뒤에 있는 우리엘이 아니냐? 나 이스라엘은 주님의 권능의 대천사장이며 하느님의 아들들 중에 우두머리가 아니더냐? 나는 하느님 얼굴 앞의 제사장 이스라엘이 아니더냐?’ 그리고 나는 소멸되지 않는 이름으로 나의 하느님을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요한이……천사였는데 빛에 대해 증언하기 위하여 몸을 취하였다는 믿음에 보다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 글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되는 증거로 사용하다가, 야곱의 문제를 다루면서 딴 이야기를 길게 해버리고 말았다.


단편B(오리게네스, <<필론칼리아>> 23권 15장)

……하느님의 책처럼, 하늘나라 전체는 이야기의 방식으로 미래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곱이 “야곱의 기도”에서 말한 다음 내용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천상의 돌판에서 너와 너의 아들들에 닥칠 모든 일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 제3절의 중요성 때문에 나는 오리게네스의 <<필론칼리아>> 23권 19장에서 단편A를 축약하고 단편B를 인용한 부분 역시 추가로 제시하도록 하겠다.


게다가 야곱은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는 형제들을 밀어낸 사람이고, 우리가 ‘내가 천상의 석판에서 읽었다’는 내용을 인용한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의 권능의 최고 우두머리이고 옛날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몸을 취하여 봉사하던 중에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된 것은 대천사장 우리엘에 의해서였다고 말이다.


남아있는 “요셉의 기도”는 (I)이스라엘의 숭고한 역할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스라엘은 (1)야곱(Ίαχώβ), (2)이스라엘, 하느님의 천사(ἄγγελος θεοῦ), (3)지배하는 영(πνεῦμα ἀρχικόν), (4)하느님을 보는 사람(ἀνὴρ ὁρῶν θεόν), (5)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 중에서 처음으로 난 자(πρωτογόνος παντὸς ζώου), (6)주님의 권능의 대천사장(ἀρχάγγελος δυνάμεως κυρίου), (7)하느님의 아들 가운데 우두머리(ἀρχιχιλίαρχος), (8)하느님 얼굴 앞의 제사장(λειτουργὸς πρῶτος ἐν προσώπῳ θεοῦ)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II)서로 우선권을 주장하는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 사이의 갈등, (III)야곱-이스라엘의 지상으로의 하강에 관련된 기이한 신화. 이 논문은 이 세 요소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I. 명칭


<요셉의 기도>의 야곱-이스라엘에 주어지는 명칭들에는 주목할 만한 정합성이 있다. 사실 야곱-이스라엘의 명칭 중 많은 것들이 필론 저작에서 로고스에, 랍비 문헌에서 미카엘에, 유대교 비의전승 문헌에서 메타트론(Metatron)에, 그리고 유대 기독교에서 예수에게 붙여진 명칭이라는 점은 놀랍다. 이것은, 직접적인 문헌의 의존 관계를 주장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전승의 공동체와 연속성을 상정하게 해 준다. 이 연속성의 중심에는 어윈 굿이넙이 <<빛에 의한, 빛(By Light, Light)>>과 명저 <<그리스 로마 시기의 유대교 상징(Jewish Symbols in the Greco-Roman Period)>>에서 묘사한 헬레니즘의 비의적(mystical) 유대교가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자 한다. <요셉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비전(秘傳, Mystery)에 관한 신화, 후대에 메르카바(Merkabah)와 메타트론에 관한 성찰로 이어지고 필론의 저작에서 ‘비신화화된’ 형태로 등장하는 신화의 귀중한 단편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1. 야곱

<요셉의 기도>에서 주어지는 명칭들은 야곱-이스라엘의 천상적 속성에만 적용되다. 사실 야곱은 그의 유일한 지상의 명칭이고, 이 명칭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A, 3: ὁ κληθεὶς ὑπὸ ἀνθρώπων Ἰακώβ) 마니교와 헬레니즘 자료에는 천사 야곱이 있긴 하지만, <요셉의 기도>에서 이스라엘은 천사에 의해 지녀진 이름이고, 야곱은 사람에 의해 지녀진 이름이다.


2. 이스라엘, 하느님의 천사

천사 이스라엘은 <<세페르 라지엘(Sefer Raziel)>>과 같은 유대교 비의전승 문서들에 나타나지만, 그 너무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어 일반화하기는 불가능하다. 헬레니즘 자료에서는 이스트라엘(Istraēl)이라는 이름이 폭넓은 자료에서 발견되며, 아마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유스티아누스(Justin)의 <<바룩(Baruch)>>(Hippolytus, Ref. V, 26, 2)에서는 세 아르카이(archai) 중 한 명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레쉬(Resch)는 이 전승이 <요셉의 기도>에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영’(πνεῦμα ἀρχικόν)으로 묘사한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추정한다.(이 추론은 기껏해야 사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각되어야 한다)

유대교 비의전승 문헌에서, 케두샤(Kedusha)를 찬양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에 상응하는 전통에서 미카엘이나 메타트론이 하듯이) 왕좌 앞에서 천상의 예배를 인도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하늘나라의 인물로 인격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바빌로니아 탈무드>> <훌린(Hullin)> 91b에 나오는 익명의 바라이타(baraitha)에 묘사된 두 단계의 행위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한 분 앞에 사랑받는다. 그는 섬기는 천사들보다도 훨씬 복되다. 섬기는 천사들은 하루에 한 번 노래를 반복할 뿐이지만, 이스라엘은 매시간 노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더구나 섬기는 천사들은 이스라엘이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노래를 시작도 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피르케 헤칼로스(Pirke Hekhaloth),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가 하늘나라 중앙에 서서 천상의 성가대를 인도하는” 환상이 발달하였다. 이 전승이 오래 되고 널리 퍼졌다는 점은, 천상의 옥좌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는 나그함마디의 콥트어 <<코덱스 II>>에 의해 최근에 예기치 않게 확증되었다. 이 메르카바(Meerkabah) 텍스트에는 케루빔(Cherubim)과 세라핌(Seraphim) 사이 사바오트(Sabaoth)[만군萬軍] 가까이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음으로 난 자(Ogwrp `mmise ), 하느님을 보는 사람(prvme etnag epnogte)”이 서 있다. 이 한 줄에서 우리는 <요셉의 기도>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중요 명칭 둘(장자와 신을 보는 자)을 찾을 수 있고, 이 명칭들은 하늘나라 옥좌 앞의 천상의 예배라는 맥락 속에 있다.

족장 야곱-이스라엘에 관한 성서와 미드라쉬 전승들도 <요셉의 기도>에 영향을 주었다. 지상의 야곱에 적당한 명칭들이 천사 이스라엘에 부여되었다. <요셉의 기도>의 구절(A,3-4) “사람들은 야곱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야곱인, 나 야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즉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불러주신 사람이다”는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창세기> 32: 29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요셉의 기도>에서 천사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은 “너는 하느님과 겨루었다”(myhla m[ tyrX)(<창세기> 32: 29)를 “왕자”(rX)와 연결시켜서 그 구절을 “너는 하느님과 함께한 왕자로서”, 즉 천사들 강운데 하나라고 해석한 해석학 전통에 근거를 두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셉의 기도>의 갈등 모티브를,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씨름을 하였던 신비한 인물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천사(혹은 유대 기독교 자료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 였다는 전승과 연관시킬 수 있겠다. 그래서 <피르케 데 랍비 엘리제(Pirke de Rabbi Eliezer)> 3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천사는 그의 이름을 자기 이름을 부르듯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3. 지배하는 영

나는 ‘지배하는 영’(πνεῦμα ἀρχικόν)(A,2)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이 명칭은 다양한 천사들이 행성의 궤도, 일주일의 날들, 달들, 황도의 기호들 등에 배치되어 있는(헬레니즘과 영지주의의 아르카이와 비슷하게) 점성술적 천사론과 관련이 있지 싶다. 그러나 나는 이 특정한 문구를 어느 점성술 텍스트 안에서도 위치를 잡아줄 수 없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 명칭이 국가 천사 개념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천사는 보통 미카엘이지만, <요셉의 기도>에서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천사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한 자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4. 하느님을 보는 사람

이 명칭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후에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myhla ytyar)고 외친 <창세기> 32장 31절에 성서적인 기원을 갖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느님을 보는 사람”(ἀνὴρ ὁρῶν θεόν = la har)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필론 저작에서 가장 발달되었다. 이 구절은 필론의 글에서 23번 등장하며 26개의 정도의 추가적인 텍스트에서 표현되거나 함축된다. 이 파생은 히브리어 언어유희에 의존하는 것이고 필론에 의해 주장되었다기 보다는 그렇게 가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이전의 전승으로부터 이것을 끌어왔다고 추측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요셉의 기도>를 제외하고는 기독교 자료들은 아마 필론, 두 유대인(?) 기도문, 그리고 후기(?) 히브리 미드라쉬에 의존하는 것 같다―이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요셉의 기도>에서 필론 저작에 병행하는 부분은 이 한 부분의 접점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사실 앞서 제시된 것처럼 <요셉의 기도>에 나오는 야곱-이스라엘의 명칭들 대부분은 필론에 의해 로고스에 적용된다. 가장 극적인 예는, 몇몇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언어의 혼란에 관하여(De confusione linguarum)>> 146장에 등장한다.

하느님에게서 처음으로 난, 로고스는 천사들 중에서 장자권을 쥐고 있는 자, 말하자면[as it where는 as it were의 오타?] 천사장이다. 그리고 그를 위한 많은 이름들이 있다. 태초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을 따른 사람 그리고 보는 사람, 즉 이스라엘. 야곱-이스라엘은 <요셉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 난 자”(A,5), “천사장”(A,15) 그리고 “하느님을 보는 사람”(A,4이하)라고 불린다.


5. 하느님이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 중에 처음으로 난 자

“에고 프로토고노스 판코스 저우 저오포이우메누 휘포 떼우”(ἐγὼ πρωτόγονος παντὸς ζώου ζωοποιουμένου ὑπὸ θεοῦ)가 <골로새서> 1: 15, 17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프로토토코스 파세스 크티세우스……카이 아우토스 에스틴 프로 판톤[πρωτότοκος πάσης κτίσεως …… καὶ αὐτός ἐστιν πρὸ πάντων])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주장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그히오스 프로토토코스 모우 히스라엘[Γἱὸς πρωτοτοκός μου Ἰσραήλ], cf. <시편> 89: 27)라고 선언한 <출애굽기> 4: 22에 성서적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분명히 국가를 말하고 있지만(cf. <에즈라 4서> 6: 58), 어떤 랍비들은 이 문장이 족장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라바(Exodus R)> 19: 7의 랍비 나탄). 이 개념은 족장이 창조 이전에 지어졌다는 교리(<요셉의 기도> A,2이하 “모든 에르구에 앞서는 아브람과 이삭”[Ἀβραὰμ καὶ Ἰσαὰκ προεκτίσθησαν πρὸ παντὸς ἔργου]에서 언급된 전승)나 이스라엘(분명히 국가를 말하지만 족장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이 창조 이전에 지어졌다는 교리로 발달하였다.


6. 주님의 권능의 대천사장

이것은 헬레니즘 문헌에서 아르캉겔로스(ἀρχάγγελος)[대천사장]이라는 용어가 가장 초기에 출현한 것이고, 이곳에서는 특히 “주님의 권능을 지닌”(뒤나메오스 퀴리우[δυνάμεως κυρίου])라는 수식을 받아 [lwdgh rX]로서의 미카엘과 연관된 전통적인 어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7. 하느님의 아들들 중의 우두머리

아르키키리아르코스(ἀρχιχιλίαρχος)라는 명칭은 이 문서에서 하팍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해당 문헌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단어-주])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명칭은 헬레니즘 유대교 문헌에서 [ἀρχιχιλίαρχος τῆς δυνάμεως ϰυρίου]인 미카엘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다니엘서>(칠십인역과 [**Theod.]) 8:11, <제2 에녹서> 22: 6이하, 33: 10이하, <제3 바룩서> 11:1이하 등)


8. 하느님 얼굴 앞의 제사장

“하느님의 얼굴” 앞에 드리는 천사 이스라엘의 예배(그를 “보는” 모티브뿐만 아니라)는 <창세기> 32장 3절에서 씨름한 장소에 야곱이 부여한 명칭 브니엘(Peniel)에 근거를 두었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위해 흔히 미카엘, 가브리엘, 메타트론과 연관된 명칭을 사용하는 <요셉의 기도>의 경향성에 비추어 볼 때(다시 말해, 1, 2, 6, 7에서 다룬 명칭들), “ὁ ἐν προσώπῳ θεοῦ λειτουργὸς πρῶτος”은 유대교 비의전승 문헌에 나오는 인물들에 매우 일관적으로 사용된 ‘mygph rX’의 거의 정확한 번역이다.

<요셉의 기도>에서 이스라엘에 사용된 다양한 명칭들을 검토함으로써, 그 명칭들이 모두 유대교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명칭은 구약 성서와 그것의 하가다 주석으로부터 유래했고, 어떤 명칭들은 연관된 지혜 신학뿐만 아니라 더 흔히는 헬레니즘과 메르카바 비의전승 내에서 유래했으며, 다른 명칭들은 필론과 매우 밀접했다. 그 어느 명칭에도 유대교 외적인 영향(즉 기독교, 헬레니즘이나 영지주의 전통으로부터의 영향)을 상정할 수 없다. 이 점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모티브인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의 전투와 야곱-이스라엘의 하강 신화를 탐구할 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학자들은 이들에 대해 유대교 외적인 영향을 상정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절에서 어떤 주어진 명칭에 대해서도 단일한 해석을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대신 유대교 전통 내에서 가능한 한 다양한 배경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일정한 일반화가 가능하다. 대부분의 명칭들은 족장 야곱, 특히 <창세기> 32장 이야기와 관련된 자료(즉 명칭 1, 2, 4, 5, 8)나 미카엘, 가브리엘, 메타트론과 관련된 자료들(즉 명칭 1, 2, 3?, 6, 7, 8)로부터 이끌어낸 것들이다. 둘째로, 어떤 명칭들은 천상의 전례와 관련된 전승으로부터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즉 명칭 2, 6, 7, 8, 그리고 A, 17이하에서 이스라엘을 “꺼지지 않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아래에서 주목하겠지만,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전설, 미카엘, 가브리엘, 메타트론과 같은 인물들, 그리고 천상의 전례는 헬레니즘 유대교와 랍비 자료에서 종합되고, 그래서 그들이 <요셉의 기도>에 상호적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강화한다.



II. 갈등


(1)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 간의 갈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요셉의 기도>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대략 다섯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첫 번째 접근방법은 “이 저작은 명백히 반기독교적이다”라고 선언한 찰스(R. H. Charles)와 [이 저작에서] “반기독교적인 원한(animus)”을 읽어낸 마셜(J. T. Marshall)이 제시한 것이다. 좀 더 신중한 형태로는 다음과 같은 제임스(M. R. James)의 의견이 이에 해당한다. 즉 이 텍스트는 유대교의 것이며 저자는 “기독교 신학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 급소에 집중하였다. 그것이 이 책의 주목적인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해석은 이 텍스트가 “반유대교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한 버치(V. Burch)의 논문처럼 다른 쪽 극단을 취한다. 세 번째 입장은 이 텍스트가 유대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한 다니엘루(J. Daniélou)가 취하는 것이다. 네 번째 관점은 이 텍스트가 유대교적이긴 하지만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의 경쟁으로 인해 분명히 전(前)영지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그랜트(R. M. Grant)에 의해 대표된다. 다섯 번째 접근방식은 내가 동의하는 것으로, <요셉의 기도>가 유대교 텍스트라는 오리게네스의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저작에서 반기독교적 논쟁을 읽어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엘은 그리스도와 동격이고 야곱-이스라엘은 “기독교인들이 주 예수에 대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숭고하고 초자연적인 성격을 세 족장들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유대인의 노력과 동격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우리엘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사례는 적어도 에티오피아 기독교의 두 문서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는 야곱과 씨름했던 상대를 로고스(Logos), 선재(先在)하는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순교자 유스티아누스, 오리게네스 등. 위의 주21을 볼 것.) 이렇게 우리엘을 강등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위가 공격받게 된다. 찰스와 마셜에 의해 발전된 이 해석은, 야곱-이스라엘에 할당된 편명이 이미 예수에 할당된 기독교의 편명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한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유추된 것이 분명하다. 두 천사 주인공의 동일시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가정이다. 그러나 종교사(religionsgeschichtliche)에 의하면, 앞에서 필론 등에 의해 인용되었던 자료가 이 연대기를 거슬러 올라가 존재하려면 최소한 50년이 요구된다. 유대인이 기독론 편명을 모방했다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이 이미 존재하던 유대교 용어를 차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해석에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제임스가 발전시킨 견해에 대해서도 동일한 반론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 용어와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예로, 족장들의 선재, 천상의 인물이 “사람들 사이에 장막을 치고 거한다는” 관념, “모든 살아있는 것들 중 처음에 난 것”, “그의 이름은 나의 이름에 앞설 것이다”라는 구절을 든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유대교 자료로부터(특히 지혜 문헌과 필론 저작으로부터) 전거를 댈 수 있는 것들이다. 게다가 오리게네스가 이 텍스트의 성격을 완전히 오해하지 않는 한, 왜 반기독교적인 저작이라고 주장되는 이 텍스트를 “가볍게 무시되어서는 안 될 글”(οὐϰ εὐϰαταφρόνητον γραφήν)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는지는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버치의 반유대교 이론은 <요셉의 기도>와 <<유대인들에 대한 반박문(Testimonia adversus Iudaeos)>>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그는 <요셉의 기도>의 “주요 테마”가 “천사로 출현한 그리스도가 다른 천사를 압도하는 것, 즉 우리엘이 이스라엘을 압도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즉, 키프리아누스의 <<논문>>에서처럼 <요셉의 기도>에서도 “야곱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이전 형태(prototype)이자 예형(type)”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 독특한 구절을 포한한 에티오피아의 <성 클레멘스 이야기(Narrative of St. Clement)>에 의존한 것이다.

그리고 나(즉, 베드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 할례에 관한 계율을 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즉 그리스도)이 천사 우리엘의 형상으로 내게 나타나셔서 낡은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율법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버치가 가정하는 것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킨다. 이 에티오피아 텍스트는 버치의 가설에서 요구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우리엘을 대신한다기보다는, 우리엘이 이스라엘의 율법을 철폐하는 것으로 모습을 그린다. 게다가 이것은 이른바 반유대적 편견으로 <요셉의 기도>가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τῶν παῤ Έβραίοις φερομένων ἀποκρύφον τὴν ἐπιγραφομένην Ἰωσὴφ προσευχήν)고 한 오리게네스의 진술과 조화되기 힘들다.

유대 기독교 기원을 주장하는 다니엘루의 가정은 문제가 있는 두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 번째 전제는 레쉬(Resch)의 조사에 호소해서 <요셉의 기도>가 유대 기독교와 연결되어 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쉬는 (극단적으로 미약한 근거에서) <요셉의 기도>의 기원을 아르콘티코이(Archontikoi) 중에서 탐색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아르콘티코이는 다니엘루의 유대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들어맞지 않을 뿐더러, 내가 알기로는 다니엘루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 적도 없다. 두 번째 전제는 오리게네스가 문헌에서 ‘παῤ Έβραίοις’를 사용한 것은 유대 기독교적 성격에 대한 반론이 아니며, 오리게네스가 자기 전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계속 유대 기독교를 ‘헤브라오이’(Έβραῖοι)라 부른다는 다니엘루의 주장이다. 하지만 다니엘루가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이러한 해석을 입증해주지 않는다. 출판된 책에서 다니엘루가 갈등에 대해 해석한 것에 따르면, 우리엘(즉 야곱)은 참된 이스라엘(즉 로고스, 그리스도)에 의해 도전받기 전까지 사람들 사이에 장막을 치고 거했다. 그러나 다니엘루 신부는 [κατέβην, κατεσκήυωσα, ἐκλήθη] 동사가 우리엘이 아니라 야곱-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왔으며, 따라서 그의 해석을 무효화시켰다.

이 텍스트의 “원(原)영지주의적” 성격에 대한 그랜트의 테제는 단순히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 사이에 경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순한 갈등의 존재, 또는 이 사안에 있어서는 이원론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한 텍스트를 “영지주의적”이라고 부르기에 충분치 않다.


(2) 유대교 자료에 근거해서, 나는 적어도 세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첫 번째 접근방법은, <요셉의 기도> 이야기가 야곱과 에서 사이의 갈등의 투사를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성서의 설명에서 제시되듯이, 이 투쟁은 리브가의 태 안에서 시작되었고(<창세기> 25: 22-6),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획득하고(<창세기> 25:29-34) 축복받음(<창세기> 27)을 거치며 계속되었다. <창세기> 25장 23절과 같은 텍스트들에 근거해서, 하가다 문헌에서는 이 갈등이 에서와 야곱의 자손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과 수호천사들 사이의 최후의 종말론적 갈등에까지 확장된다고 말한다.

이 갈등을 밝혀주는 가장 오래된 자료 층위는, <창세기> 36장 1, 8, 9, 43절과 같은 구절에 근거해서 로마를 에서, 에돔, 세일 등과 동일시하고, 일반적으로 미카엘인 이스라엘(즉 야곱)의 수호천사와 일반적으로 사마엘인 로마(즉 에서)의 수호천사 간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동일화가 이두메 사람 헤롯(Herod the Idumean) 시대의 것이라고 연대를 추산하는 데 동의한다. 에서와 로마의 등치는 <요셉의 기도> 이후시기에 기독교(즉 로마) 교회에 전이되어 전체적으로 우리엘과 야곱-이스라엘간의 갈등과 유사한 논쟁 자료들을 낳게 된다.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듯이, 태 안에서 시작해서 출산한 이후 전개되는 쌍둥이 형제간의 다툼(최종적으로 에서가 야곱에 의해 살해된다는 하가다의 확장판을 포함해서), 하나는 매끈하고 다른 하나는 털이 많다는 구분, 하나는 밝고 다른 하나는 “붉은” 구분 등에 대해서 말하는 성서 이야기의 다양한 요소들이 이원적 상징론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모두 후대의 것들이어서 <요셉의 기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요셉의 기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성서-미드라쉬 전승이 하나 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25장 26절의 야아케브(bqee[)에서 온 말이다.(발뒤꿈치, 발뒤꿈치를 잡는 사람, 즉 속이는 사람. cf. <창세기> 27: 36, <호세아서> 12: 3. 그리고 <예레미아서> 17: 9의 야아케브[bwqee[]]]])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는 야곱에 일반적으로 ‘프테르미스헤스’(πτερμιστής)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필론에서도 계속된다. 이것은 야곱-이스라엘에 대한 우리엘의 비난, 즉 야곱-이스라엘이 땅을 물려받을 때 에서의 권리를 빼앗고 불법으로 우월성을 주장하였다는 비난의 한 요소이다. 나는 이것이 야곱이 눈먼 이삭을 속이는 것, 염소 새끼 가죽을 쓰고서 에서의 축복을 얻어내는 것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천상의 영혼이 옷(어떤 경우엔 염소 가죽 옷)을 뒤집어쓰고 성육신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광범위한 은유에 비추어 볼 때, <창세기> 27장의 전설도 그러한 해석을 적용할 여지가 있다. <르우벤의 선집(Yalkut Reubeni)>(ad Gen. 32: 29)에 보존된 후대의 신화적 단편에 주목해보자. 여기서 천사 가브리엘은 에서로 변장하고 야곱 앞에 나타나서, 이삭의 맏아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사기꾼이 되었다고 야곱을 꾸짖는다. <요셉의 기도>에서 우리엘이 에서를 나타내고 이스라엘이 야곱을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엘을 에서의 수호천사로 동일시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유대교나 기독교 문헌에서 독특한 사례이다.


(3) 야곱과 에서간의 갈등의 세부사항들이 <요셉의 기도>에 나타난 전승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 텍스트에 나오는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 간의 갈등의 배경이 되는 가장 유력한 자료는 <창세기> 32장 24절 이하에 나오는, 야곱이 신비한 인물과 씨름을 했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 텍스트와 <요셉의 기도> 간에는 동사의 연결이 몇 부분 지적될 수 있다. 우리엘과 야곱-이스라엘 사이의 논쟁은 야곱-이스라엘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로’(Μεσοποταμία τῆς Συρίας) 올라올 때 일어나는데, 표준 칠십인역에서는 이곳을 밧단-아람(Padan-aram)이라고 옮긴다. 얍복강 근처에서 야곱과 에서가 마주친 사건은, 야곱이 에서를 피하기 위해 그곳을 떠나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면서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와 다시 결합하기 위해 밧단-아람으로부터 올라오는 여행을 할 때 일어난 일이다. <요셉의 기도>의 갈등을 삼중으로 묘사하면서 “나와 겨루고 나와 싸우며 나와 씨름하였다”(A, 10이하)고 했을 때, 오직 마지막 동사만이 성서의 설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겨룸이라는 관념은 <창세기> 이야기에 놀라울 정도로 결여되어 있는 동기를 보완해준다.

랍비 문헌들은 이 갈등에 대해 간단하고 단편적인 해석들을 제공해주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천사가 야곱과 씨름한 것은 에서와의 투쟁을 위해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서라든가 에서를 두려워하는 그를 벌하기 위해서라고 주장된다. 다른 견해로는 천사가 야곱과 싸운 것은 그의 소유에서 십일조를 바치기로 약속하였다는 것을 야곱에게 깨우쳐주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비로운 천상의 대적자를 누구와 동일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쟁이 많다. 나는 유대교나 기독교 문헌에서 우리엘을 지목하는 자료를 단 하나 알고 있는데, 그 자료는 아마 <요셉의 기도>에 의거한 것일 것이다. 가장 흔히 동일시되는 것은 미카엘, 가브리엘, 혹은 메타트론이다. <창세기 라바(Genesis Rabbah)> 77장 3절과 78장 3절에서의 랍비 하마 벤 랍비 하니나(Hama b. R. Hanina)의 견해에 따르면, 야곱이 에서의 수호천사와 씨름한 것은 형제간의 갈등이 투영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미드라쉬에 나오는 사건들의 세부사항들에는 <요셉의 기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풍부한 싸움 전승들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3세기 전승자 랍비 후나(Huna)의 이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엘과 야곱 사이의 천사의 싸움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마침내 그(천사)는 중얼거렸다. "그가 누구와 겨루고 있는지를 그에게 알려줄까?"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가 땅에 손가락을 짚자, 그 땅에서는 불이 일었다. 야곱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해서 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말아라! 나는 전체가 불로 이루어져있단 말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그리고 야곱의 집은 불의 집이 될 것이다.(<오바댜서> 1: 18)"

적어도 한 전승에 따르면 우리엘은 "하느님의 불"(우르 엘[la rWa])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후나의 설명에서 보인 천사의 행동은 그 역할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야곱은 우월하지는 않다고 해도 동등하게 높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된다. 그는 완전히 불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마찬가지로 천사의 속성을 지닌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4) 우리엘이 질투한 내용은 천상의 무리들 가운데 야곱-이스라엘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A, 11이하) 묵시록 문헌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타락한’ 천사 사이의 갈등이라는 관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 관념이 <요셉의 기도>에서 제시되지는 않는다. 새로 창조된 아담에 대한 사탄의 질투와 아담을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비슷한 예를 여기서 찾아볼 수도 없다. 이스라엘이 인간들 사이로 하강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리엘은 둘 다 분명히 천상의 인물들이고 그들의 갈등은 천상의 위계 내의 상대적인 위치에 관한 것이다. 한 천사가 다른 천사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다는 주제는 유대교 문헌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한 국가 천사가 다른 국가 천사에 대한 우선성을 가진다고 이야기하는 정치적 알레고리에서 두드러진다.

보좌 앞에서 벌어지는 천사들의 경쟁이라는 주제는 헬레니즘과 히브리 메르카바(Merkabah: 예언자 에스겔이 묘사한 하느님의 보좌, 또는 전차-역주)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숄렘이 "다른 어떤 유대 묵시록 문헌보다도 메르카바 텍스트에 흡사하다"고 지적한 초기 묵시록 <아브라함 묵시록(Apocalypse of Abraham)>에서, 야오엘(Jaoel, 히브리 텍스트에서 메타트론의 역할을 부여받는 인물)은 "하느님의 명에 의해 케루빔의 생물들(즉 하이요쓰(hayyoth))의 위협적인 힘이 서로에게 미치지 않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이다."(10장) 반면에 18장의 보좌의 환상에서 아브라함은 하이요쓰가 노래를 마칠 때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본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있던 천사가 그들이 서로 위협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나를 남겨두고서 그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생물들의 면상을 돌려놓아서 그들 서로의 얼굴을 위협하며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똑바로 쳐다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그분으로부터) 기원을 가진 평화의 노래를 그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박스(G. H. Box)가 지적하였듯이 이 그림은 <욥기> 25장 2절 "하느님께는 주권과 위엄이 있으시다.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평화를 이루셨다."에 대한 미드라쉬를 포함한 <<탄후마(Tanḥuma)>> <베레쉬트(Bereshit)> 내의 텍스트에 상응한다. <<탄후마>> 텍스트에서는 "주권"을 미카엘로, "위엄"을 가브리엘로 해석하며, 절의 뒷부분은 천사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는 하느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

……천상의 존재들도 평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별자리가 일어나면, 황소자리(Taurus)가 '내가 가장 먼저이고 그분 앞에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면 쌍둥이자리(Gemini)가 '내가 가장 먼저이고 그분 앞에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둘은 각자 자기 차례가 될 때마다 '내가 먼저다'라고 말한다.

<<피르케 헤칼롯(Pirke Hekalot)>>에서 천사 이스라엘이 하이요쓰 중 하나와 마찬가지로 천상의 성가대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마 중요할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묵시록>에서 야오엘이 했던 기능과 밀접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요셉의 기도>의 경쟁 관계는 <<탄후마>>에서 묘사된 관계와 더 밀접하게 공통점이 있다.


(5) 우리가 <요셉의 기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헬레니즘 유대교와 랍비 유대교 모두를 표현하는 이 문서에서, 야복에 의한 야곱의 씨름 모티브와 보좌 앞에서 천사의 경쟁이라는 주제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미드라쉬에서 야곱과 씨름하던 천사는 보좌 앞에서 찬송하기 위해서 새벽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창세기> 23: 26a) 이것은 야곱은 천사의 축복을 확실히 하기 전에는, 혹은 그가 천사의 이름을 알기 전에는 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창세기> 32: 26b-27)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천사들의 자리에서 노래하려고 함”으로 보는, 여기저기에 있는 텍스트들에서 발견되는 어원 전승과 결합하여 <요셉의 기도>에 반영된 것과 비슷한 야곱-이스라엘과 대천사장 사이의 천사들의 경쟁에 관한 전승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더구나 이 가정은 몇몇 자료에서 야훼가 그의 보좌 앞에서 천사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시켰 뿐 아니라 야곱과 씨름하는 천사 사이에서도 평화를 유지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한층 강화된다.

그래서 <요셉의 기도>에 나오는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간의 갈등은 야곱과 <창세기> 32장의 야복에 의한 천사 간의 상황을 그 배경으로 갖고(Ⅱ,3), 에서와 야곱의 갈등 내용에 이야기를 끌어들이기도 하지만(Ⅱ,2), 이 텍스트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메르카바 이전의 천사의 경쟁이라는 비의전승의 주제(Ⅱ,4,5)를 기반으로 했을 때라고 생각된다. 명칭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갈등을 고찰한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비유대교적 영향을 상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다시 한번 <요셉의 기도>을 유대교 비의전승의 범위 안에 위치시키게 되었다.



III. 하강 신화



(1) 제임스(M. R. James)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한다.

주요 단편에서 주도적인 관념은 천사가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할 수 있고,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지상에 거하며, 자신의 본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선택된 백성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유대교 가르침에만 있는 독특한 교리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특성이다! 그러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사용된 범례는 천상의 영의 하강, 무지한 육체를 입은 성육신, 그리고 천상의 계시자와 만남으로써 자신의 초지상적인 기원을 회상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 영지주의의 범례이다. 이것은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ς)을 통하여 ‘레테’(λήθη)와 ‘아오리아’(ἄγνοια)로부터 ‘그노시스’(γνῶσις)로 이동하는 친숙한 움직임이다. <<필론칼리아>> 23권 19장에 오리게네스의 언어로 축약되어 있는 <요셉의 기도>는 매우 놀라울 정도로 이 영지주의의 범례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권능의 최고 우두머리이고 옛날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몸을 취하여 봉사하던 중에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된 것은 대천사장 우리엘에 의해서였다”[καὶ ὄνομα κεκτημένος Ἰσραήλ. ὅπερ ἐν σώματι λειτουργῶν ἀναγνωρίζει, ὑπομιμνήσκοντος αὐτὸν τοῦ ἀρχγγέλου Οὐριήλ.] 이 텍스트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법은, 하강 신화가 인용된 출처인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 주석>>에 실린 <요셉의 기도>(A,8-10)에는 야곱-이스라엘의 망각이나 우리엘이 야곱-이스라엘의 이전 상태를 떠올리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부분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필론칼리아>>의 구절은 명백히 축약이고 오리게네스는 단순히 그에게 자연스러운 플라톤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추측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러한 접근방식의 한 변형으로, 어떤 사람들은 계시자로 물질세계로 보내어진 천사가 그곳에서 이스라엘 족장들처럼 성육신한다는 것은 오리게네스 사유 내의 신학적 모티브일 것이라고 가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여기서 오리게네스는 텍스트를 충실히 전달하기보다는 자기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의 기도>에서 실제로 남아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 오리게네스의 보고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데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필론의 저작에서도 플라톤적인 언어를 비슷하게 사용하고 족장들의 출현이라는 비의적 해석이 등장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오리게네스가 그런 용어를 사용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확장된 유대교 자료들에서 이 신화이야기(mythologoumenon)를 분명히 해줄 자료를 찾을 수 있는지 묻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 주석>>에 실린 <요셉의 기도> 인용문에 나오는 하강 신화의 언어는 분명히 지혜-셰키나(Shekinah)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신학은 렌델 해리스(Rendel Harris)의 선구적인 연구 이후 제4 복음서 서문을 연구하는 이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ὅτι κατέβην ἐπὶ τὴν γῆν καὶ κατεσκήνωσα ἐν ἀνθρώποις, καὶ ὅτι ἐκλήθην ὀνόματι Ἰακώβ.”(A,8-10) 하강에 대한 두 단어 ‘카타바이노’(καταβαίνω)와 ‘카타스케노우’(κατασκηνόω)는 모두 신약 성경에서 사용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전의 지혜문학에도 나타난다. <요셉의 기도>에 가장 가깝게 상응하는 것은 <벤시라의 지혜서> 24장 8절이다. 이 구절의 내용은 소피아가 모든 창조물 위를 돌아다닌 후 [ὁ κτίσας με κατέπαυσεν τὴν σκήνην μου] to [ Ἐν Ἰακὼβ κατασκήνωσον καὶ ἐν Ἰσράηλ κατακληρονομήθητι.] 한 하느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여기서 소피아는 다른 민족들이 거부한 후 이스라엘에 의해 받아들여진 토라와 동일시된다.(cf. vs. 23절, 그리고 <바룩> 3장 37절 이하) 마찬가지로 <요셉의 기도>의 이스라엘 명칭인 ‘πρωτογόνος’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념인 ‘προεκτίσθηαν πρὸ παντὸς ἔργου’와 함께 창조에서 지혜-토라의 역할에 대한 사유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40쪽[*추후수정]이하를 볼 것), 율법의 선재에 대한 이론과 이스라엘 민족에 관념이 인격화될 수 있다면, <벤시라의 지혜서> 텍스트에서도 비의전승적 해석에 의해서 소피아가 족장 야곱-이스라엘으로 성육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굿이넙이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이런 류의 비의전승적 독해는 족장들과 소피아 사이의 히에로스 가모스(hieros hamos)[성혼成婚]이라는 필론의 모델로 대표된다.


(3) 오리게네스의 <<필론칼리아>>에 나오는 <요셉의 기도>의 축약에 실린 하강 신화의 독특함은, 천상의 소피아가 스스로 성육신하거나 야곱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이스라엘이 그의 지상의 짝패인 족장 야곱으로 성육신한다는 점에 있다. 하강과 상승에 관해 <요셉의 기도>과 관련된 그 어떤 사유도 천상과 지상의 야곱-이스라엘과 관계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사유가 집중되는 분명한 초점이 벧엘[베델, 하느님의 집]에서의 환상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이다.(<창세기> 28: 10-27) 이것은 접촉의 순간,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명시적인 언급 외에도 천상과 지상의 영역 간의 입장과 재입장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성경 이야기는 야곱이 땅 위에서 자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상의 사다리가 있고, 그 위에는 야훼의 모습이 있는 친숙한 그림을 보여준다. <<타르굼(Targumim)>>은 천사들의 움직임의 동기를 제시하고, 부수적으로 왜 천사들이 처음에는 오르고 그 다음에 내려와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그와 동행한 천사들이 높은 곳의 천사에게 알리기 위해 내려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와서 보라. 영광의 보좌 위에 있는 야곱의 상을, 당신이 보고 싶어 했던 야곱을 보라. 그리고 지켜보라. 주님 앞에 있던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돌보러 내려왔다.”

마르카바에 야곱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는 초기 랍비 자료의 전승은 족장들을 하이요쓰와 통합하려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천상의 이스라엘 전승 자료의 반영일수도 있다. 그래서 <<헤카로쓰 라바티(Hekhaloth Rabbati)>> 9장의 주목할 만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이 케두샤를 노래불렀을 때, 하느님은 메르카바에 새겨진 야곱의 상을 껴안고 입맞추고 어루만지셨다.”

이 주제가 확장되어 정교화된 모습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아모라임(Amoraim[유대교 학자-역주]) 랍비 히야(Ḥiyya)와 랍비 야나이(Yannai) 간의 토론에서 볼 수 있다.

랍비 히야와 랍비 야나이는 (<창세기> 28:12b의 ‘wb’의 의미에 대하여) 의견이 달랐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천사들은 사다리[*mlwsb] 위를 오르고 내려온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야곱[bq[yb] 위를 오르고 내려온다. 그들은 그를 찬양하고 비난한다. 그들은 그 주변에서 뛰어다니고, 그 위에서 뛰고, 그를 비웃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아, 네 위에서 내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이사야서> 49; 3)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너는 높은 곳에 상이 새겨진 그 분이다. 그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의 상을 본다.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그가 자는 것을 본다. 이것은 앉아서 판결을 내리는 왕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보좌실로 올라가 그가 앉아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방으로 내려와서 그가 자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그들(즉 천사들)은 그를 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그의 옆에 서계셨다’.” 랍비 시므온 벤 라키쉬(Simeon b. Laḳish)가 말했다.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님은 파리가 앉지 못하게 잠자는 아이에 부채질을 하는 아버지와도 같으시다……” 히야와 야나이는 (<창세기> 28:13a의 [wyl[]에 대하여) 의견이 달랐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주님은 사다리 옆에 서계셨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는 야곱 옆에 서계셨다.”……시므온 라키쉬가 말했다. “이것은 족장들이 메르카바 모양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즉 l[’을 ‘위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남성 접미사는 야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히야와 야나이 사이의 논쟁, 그리고 시므온 벤 라키쉬가 끼어들어 제시하는 의견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해왔던 많은 모티브들이 한데 모여 있다. 보좌 위에 새겨진 야곱의 천상의 상, 야곱의 천상의 상과 아래서 잠자는 족장의 모습 간의 대조, 메르카바를 구성하는 족장들, 야곱-이스라엘에 대한 천사들의 적의와 천사들의 오르내림. 이에 더하여 ‘wb’를 ‘bq[yb’으로 보는 야나이의 해석은 야곱이 우주적 크기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이 주제는 제4복음서에서 사다리 환상을 언급한 것에 나타난다.(“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ὄφεσθε τὸν οὐρανὸν ἀνεῳγότα καὶ τοὺς αγγέλος τοῦ θεοῦ ἀναβαίνοντας καὶ καταβαίνοντας ἐπὶ τὸν Γ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요한복음> 1: 51) 그리고 후기 비의전승 문헌에서 인격화된 야곱의 사다리로 나타나는 메타트론의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요셉의 기도>를 위해서, 그리고 <<필론칼리아>>의 오리게네스의 축약에 나타난 분명한 영지주의 용어들의 문제를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위의 메르카바의 야곱의 상과 아래의 잠자는 모습 간의 대조이다. 앞에 인용된 랍비들이 이 대조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와는 별도로, 잠을 하느님에 대한 무시나 참된 자아의 망각으로 보는 보편적인 은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구분이 <요셉의 기도>의 축약이라는 그림에 이스라엘의 천상적 기원 망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충분하다.

내가 알고 있는 유대교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요소 하나는 천상의 이스라엘이 하강한다든지 지상의 야곱이 상승한다는 관념이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 위에서 천사들의 오르내림은 그 자체로 이 모티브의 기원을 제공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앞의 절과 마찬가지로 이 절에서 나는 <요셉의 기도>에는 유대교 전승의 관점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하강 신화와 관련해서 나는 야곱의 베델에서의 환상을 둘러싼 전승의 관점에서 오리게네스의 인용의 신빙성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4) <요셉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비의전승의 신화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체로 천사장 이스라엘의 하강, 야곱의 몸으로의 성육신, 회상, 그리고 이전의 천상의 상태로의 상승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신화는 헬레니즘 시기 지중해 세계의 다양한 전승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천상적 존재의 지상으로의 하강, 천사 인물을 만나 회상함, 그리고 (때로는 전투를 통해) 위로 돌아감은 일반적인 영지주의 유형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에 맞아떨어진다. 우리가 지상의 야곱-이스라엘을 (케린투스(Cerinthus)의 그리스도 유형과 비슷한) 전적으로 가현적인(假現的, docetic) 인물로 해석할 것인지, (모튼 스미스(Morton Smith)의 도시테오스(Dositheus), 요한, 예수, 시몬과 메난드로스(Menander) 논의와 비슷하게) 하늘의 힘이 등장하여 성육신한 것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비덴그렌(G. Widengren)의 저작을 통해 밝혀진 것처럼) 천상의 전령으로 해석할 것인지는, 나에게 해결되지 않은 물음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형들에서 특징적인 것은 신화가 신자들에 의해 의례적으로 전용(轉用)될 수 있다는 것, 즉 ‘객관적인’ 이야기가 ‘주관적인’ 상관물을 갖는다는 것이다. 족장 야곱-이스라엘이라는 범례적 인물에 의해 성취된 것은 아마도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서도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관적인’ 경험의 유형은 신비한 것의 메르카바로의 상승, 천사 대항자들에 의한 위험으로 가득 찬 상승, 천상의 보좌 위의 하느님 형태의 환상으로 귀결되는 상승일 것이다. 야곱의 아들을 위한 상승의 길―내가 야곱-이스라엘을 위한 상승의 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은 야곱의 사다리(스칼라 이아코비[scala Iacobi])이다.(중요하게도 이러한 해석은 적어도 오리게네스의 <<켈수스에 대항하여(Contra Celsum)>> 6장 21절 암시된다.) 그래서 <요셉의 기도>는 내가 헬레니즘 시기 지중해 종교의 근본적인 유형이라고 믿게 된 것을 입증하는 일군의 텍스트들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그 근본적인 유형이란 천상의 인물의 하강과 상승, 즉 별-천사의 영역과 주술치료의 실천을 통해 신앙되는 영혼의 천상 여행(Himmelreise der Seele)과 관련되는 천문 비의전승을 말한다. <요셉의 기도>가 다른 상승 문헌과 구별되는 것은 야곱-이스라엘이라는 범례적 인물이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메르카바 텍스트에서는 족장들이 규범적인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앞에서 인용된 시므온 벤 라키쉬의 격언, “족장들이 메르카바이다”는 제외하고.)

그러나 굿이넙이 <<빛에 의한, 빛>>에서 증명해 보였듯이 헬레니즘 시기 유대교에서는 족장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일일이 증명할 필요도 없이, 내가 <요셉의 기도>의 신학 내에서 찾은 요소들은 굿이넙이 듀라 시나고그(Dura Synagogue) ‘큰 제단벽’의 상징체계를 통해 논의한 내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제단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사다리와 같은 커다란 포도나무가 메인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에 포도나무 발치에는 족장 야곱 인물상이 기대고 있다. 가지 부분에는 천상의 가수 오르페우스 인물상이 있다. 그리고 정상에는 보좌와 권능이 있다. <요셉의 기도>에서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하강에 주어져 있지만, 듀라의 벽화에 대한 굿이넙의 설명에서는 상승에도 ‘가치’가 비슷하게 유지된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사람의 하얀 옷을 입은 족장에 의해 바닥에서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올라가서 권능을 지닌 보좌 옆에 영원히 서있을 수 있다.

‘Προσευχὴ Ἰακώβ!’라는 제목이 붙은 헬레니즘 유대교 주문에서 병행구절이 더 발견된다. 여기서 기원하는 이는 하느님께 구원의 행위를 간구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주여, 나에게 지혜를 채워주소서. 힘을 주소서. 주여, 나의 마음을 선한 것으로 채워주소서. 나는 지상에 있는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원히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야곱이라는 이름(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족장을 말할 가능성이 큼)에서 우리는 소피아라는 ‘은총’을 받아서 자신이 “지상에 있는 천사”(ὠς ἄγγελον ἐπίγειον)이고 그럼으로써 “영생하게 된” 것을 깨닫는 존재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의 그림을 얻는다.

<요셉의 기도>는 족장들의 상승이 그들의 천상적인(혹은 천사적인) 본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헬레니즘 유대교 문화권 안에 위치한다. 프로세우케 요세프(Προσευχὴ Ἰωσήφ)는 천상의 인물의 ‘객관적인’ 신화 이야기이다. 그리고 프로세우케 야코프(Προσευχὴ Ἰακώβ)는 이 구원이 개인 신자 내에서 ‘주관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표현된 것이다.

완전한 유형은 에녹이라는 인물을 통해 예시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전승을 많이 지니고 있는 슬라브어 <에녹>에서 등장한 그가 특히 그러하다. 이 텍스트에서 에녹은 원래 사람이었다.(1장, 서론) 그는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된다.(22장 4-10절, cf. <에녹> 10.3-4와 48C) 그는 사람으로 지상에 돌아온다.(33장 5-10절)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천사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위로 돌아간다.(67장 2절)

나는 <요셉의 기도>의 가장 놀라운 요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텍스트가 1세기나 2세기 유대교 비의전승라는 환경에 자리 잡아야 함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나는 천사 야곱-이스라엘의 명칭들,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 간의 갈등, 천상의 이스라엘의 하강을 살펴보았다. 각각의 예에서 나는 헬레니즘 유대교와 랍비 문서에서 상응하는 전승들을 적시하고자 했다.

천사 이스라엘의 존재는 헬레니즘 (유대교) 주술 파피루스와 후대 유대교 비의전승 문헌 모두에서 암시된다. 랍비 자료에서는 야곱이 씨름한 천사의 이름에서, 헤카로쓰 문헌에서는 보좌 앞에서 천사의 전례를 이끄는 천상의 이스라엘을 통해 이야기된다.(1절,2) <요셉의 기도>에서 주어진 다양한 명칭들은 랍비와 묵시록 텍스트들의 미카엘에 대한 명칭들에 상응하는 한편, 구약과 미드라쉬 내의 야곱-이스라엘에 적용되는 명칭들뿐 아니라 유대교 비의전승 문서의 메타트론과 유대 기독교 저자들의 그리스도에도 상응한다.(1절,1,2,4,5,8) 가장 놀랍게 상응하는 것은 필론이 로고스에 부여한 명칭들에서 찾을 수 있다.(특히 1절,4)

야곱-이스라엘과 우리엘 간의 다툼을 살피면서, 나는 이 다툼이 반기독교적이거나 반유대적적인 논쟁이라는, 또는 이 갈등이 유대교 영지주의에서 나왔다는 이전학자들의 주장들을 기각하였다. 내가 주장한 것은 <요셉의 기도>가 확실한 유대교 문서와는 것이었다.(2절,1) 몇 가지 특징들은 야곱과 에서 간의 갈등 전설에서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2절,2) 그러나 이 갈등의 배경은 분명히 <창세기> 32장에서 천사와 씨름한 야곱으로 소급될 수 있다.(2절,3) 나는 이 갈등을 헬레니즘과 랍비 비의전승 문헌에 나오는 하느님의 보좌 앞에서의 천사들의 경쟁이라는 맥락 안에 놓고자 하였다.(2절,4,5)

하강 신화라는 영지주의적 언어의 문제, 특히 오리게네스의 <<필론칼리아>>에 실린 <요셉의 기도> 축약에 나타난 언어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유대교 자료를 바탕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3절,1,2) 나는 이스라엘이 야곱으로 성육신하고 그의 천상의 기원을 망각했다는 신화들이, 메르카바 위의 야곱의 상과 아래서 자고 있는 족장의 모습 사이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사다리에 대한 1세기의 논의들로부터 끌어온 것들이라고 제안하였다.(3절,3) 최종적으로 나는 헬레니즘 유대교에서 하강 신화로 ‘객체화된’ 상승 경험에 대한 ‘주관적인’ 상관물로 보이는 두 증거를 지적하였다. 나는 족장의 원형적 역할에 대한 강조(랍비 메르카바 텍스트에는 결여되어 있는 강조점) 때문에 아마 <요셉의 기도>가 헬레니즘 비의전승 유대교의 범위 안에 위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3절,4)



후기

<요셉의 기도> 단편은 다음 책에 편리하게 편집되었다. A.-M. Denis, Fragmenta Pseudepigraphorum Graeca ([Pseudepigrapha Veteris Testamenti Graeca, vol. III] Leiden, 1970), pp. 61f. 이것은 데니스의 책에서 논의되었다. Denis, Introduction anx pseudépigraphes grec d'Ancien Testament ([Studia in Veteris Testamenti Pseudipigrapha, vol. I] Leiden, 1970), pp. 125-127. 처음에 이 논문을 쓸 때는 다음 책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H. Priebatsch, Die Josephsgeschichte in der Weltiliteratur: Eine legendengeschichtliche Studie (Breslau, 1937), pp. iv-v, xvii, 8-14, 22f., 33f., 37-44. 그는 1세기 에세네 지방에 대해 환상적인 주장을 제기하였고, 필론이 <요셉의 기도>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거숌 숄렘(Gershom Scholem) 교수와의 개인적인 편지에서 그가 <요셉의 기도>가 유대교 신비주의 텍스트임을 믿는다고 밝힌 점이다.

더 많은 유사점들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그 유사성들은 이 논문에서 주장한 입장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나는 다음의 중요한 논문에 주목하고 싶다. G. Vermes, "The Archangel Sariel: A Targumic Parallel to the Dead Sea Scrolls," in J. Neusner, ed., Christianity, Judaism and Other Greco-Roman Cults: Festschrift M. Smith ([Studies in Judaism in Late Antiquity, vol. XIII] Leiden, 1975), Vol. III, pp. 159-166. 이 논문은 <요셉의 기도>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네오피티 타르굼(Neofiti Targum)>>을 바탕으로 하고 <창세기> 32:25-32에 이르는 <요셉의 기도>의 싸움 전승, 즉 야곱과 씨름한 천사를 “천상에서 찬양하는 이들의 우두머리” 사리엘(Sariel)과 동일시하는 전승이 고대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존재했음을 확실히 해준다. 위에서 주목한 것처럼(그리고 베르메스가 확장한 것처럼) 수리엘은 에티오피아판 <에녹1서> 9:1에서 우리엘의 자리에 등장한다. 또 <에녹1서> 10:1에서 한 그리스어 판본은 우리엘이라고 읽고, 다른 그리스어 판본은 이스라엘이라고 읽으며 에티오피아 판본에서는 아스릴요르(Asreelyor)라고 읽는다. 이 동일시에 대한 베르메스의 설명도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내 제안을 강화시켜 준다. 즉 “‘하느님 얼굴’ 앞의 천사 이스라엘의 예배는 (그 분을 ‘본다’는 모티브와 함께) <창세기> 32장 30절의……브니엘이라는 명칭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찰스워스(J. Charlesworth)가 편집하는 듀크더블데이(Duke-Doubleday)판 외경집에 실릴 <요셉의 기도> 주석에서 이 논문을 십분 활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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