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1 17:16

신, 궁극적 실재의 방편 독서: 메모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것”이라고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기독교 위주의 종교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의는 계속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식의 정의를 교정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이다. 
유럽의 불교인들은 서구적인 종교 개념의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독일의 불교”라는 김명희 선생님의 발표의 한 대목이다.

달케(Paul Dahlke, 1865-1928)는 종교가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면 종교로서 불교를 정의할 때 불교가 ‘신 없는 종교’의 구조를 갖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달케는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단지 이 질문의 답이 실재로부터 주어질 수 없을 때 종교적 방편개념으로서 ‘신’이 필요한 것이다. 즉 인류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방편으로서 ‘신’ 개념이 필요하다는 게 달케의 주장이었다.

독일 불교인 달케에 대해서는 이 글(이동호, “유럽불교의 개척자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편이다. 그는 종교는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다. 멋있는 표현이다. 신은 ‘저편’에 대한 하나의 상징, 불교적인 언어로는 방편이다. 저편은 ‘무한자’나 ‘궁극적 실재’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표현이다. 그의 설명 논리는 불교적인데, 여기엔 쉽게 거부하기 힘든 힘이 느껴진다.

덧글

  • Experiment 2011/05/29 07:45 # 삭제 답글

    종교를 삶의 저편으로 정의한다는 것, 그리고 신은 단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제게도 직관적으로 무척 와닿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아이디어가 불교적인 동시에, 특히 일레인 페이절의 책에서 읽은 영지주의와 가까운 견해인 것도 같습니다. 삶의 저편은 영어로 어떻게 쓸까요? Other-lifeness?
  • 房家 2011/05/29 15:19 #

    잘 증명된 부분은 아니지만 영지주의가 있던 서남아시아와 불교가 있던 인도 북부 사이에는 사상적 영향관계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조각이 간다라 미술에 영향을 준 것처럼, 반대로 인도 사상이 유럽쪽에 영향을 준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저도 페이젤 책을 읽다가 인도적 사유(혹은 동양적 사유)가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삶의 저편은 우리라면 피안(彼岸)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지만 서구에서 구체적인 개념으로 발달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그저 'the other world'나 'the world beyond'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정도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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