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9 17:29

개념 탑재라는 흐름 독서: 메모

경험적인 것과 관련될 때 우리는 사물들의 질서가 미리 존재하고 우리의 인식은 거기에 부합해서 따라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다. 인식의 틀이 우리의 창조물임을 인정치 않으려는 것이다.

그린비출판사의 <개념어총서> 시리즈를 여는 글, "당신의 개념이 당신의 삶이고 세계이다!"(고병권)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사물들의 질서’와 ‘인식의 틀’은 개념(범주라고 해도 좋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저항심은 일반적인 것으로, 종교학의 중요 ‘개념’인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글을 따라가도록 하자.

물론 인식의 틀이 우리의 창조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경험에 선행한다는 걸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해둘 것은 그런 선험적인 인식틀도 사회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형성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이상한 말이지만, 그리고 칸트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선험적인 것도 역사를 갖는다. 그것은 천부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측정하고 파악하기 위해 전제하는 잣대들, 우리가 무언가를 보기 위해 먼저 갖추어야 하는 렌즈들도 분명히 창조되고 형성되어 온 것이다. 맑스처럼 말해 보자면 우리는 우리의 전제 또한 창출해 왔다. 우리 지성의 힘, 우리 사유의 능력은 이처럼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경험 이전에 오는 인식틀로서 개념을 생산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고병권, “당신의 개념이 당신의 삶이고 세계이다”, <<개념어총서 WHAT 가이드북>>(그린비, 2009), 7-8.]

개념은 형성된 것이며 역사적으로 전승된 것이라는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글의 명료함에서 저자의 사유의 힘이 느껴진다. 철학적 훈련이 부족한 나로서는 부러움도 느껴진다.
개념이 잘 나가는 시대이다. 중고딩들도 ‘개념 탑재’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질타하는 시대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어린이 도서 시장에는 개념어 학습 사전이 잘 팔리고 있고(나도 잘못하면 그런 책을 준비할 뻔 했다), 그린비의 개념어 총서도 호응을 받으리라 예상된다. 그렇다면 “19세기 한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종교 개념 탑재”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나도 이런 흐름 위에 있는 것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종교 개념은 종교학에서 오랫동안 논쟁중인 주제이다. 그래서 그런 주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 자체가 식상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이론적 논쟁은 논쟁이고, 막상 그런 논쟁을 소화해서 자신의 고민으로 지니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내가 만난 종교연구가의 9할 이상은 ‘종교’라고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을 뿐(‘종교’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9세기말 이후이다), 그 전에도 종교에 해당되는 대상은 엄연히 존재해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종교’라는 인식의 틀이 ‘우리’의 창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내가 준비하는 일이 “경험 이전에 오는 인식틀로서의 개념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논의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지만 인식틀이 생산되어 온 과정을 되짚는 일은 충분히 되리라고 기대한다. 나의 작업이 개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종교 분야에 적용하는 그런 작업이 되려면, 일반적인 논의들을 읽고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야 나도 흐름을 좀 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개념어 총서>>를 질러야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덧글

  • 히읗 2009/12/10 09:29 # 답글

    선험적인 것에 어떻게 ‘사물들의 질서’와 ‘인식의 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능과 같은 것이 선험적인 것이라는 뜻일 터인데 말입니다.
  • 房家 2009/12/10 14:47 #

    이 글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칸트적인 의미보다는 말 그댈로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이라는 의미로 '선험'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칸트가 범주를 선험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도, 그것은 본능이라기보다는 사물의 질서나 인식의 틀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 히읗 2009/12/10 15:55 # 답글

    첫째 줄에서, `......걸 부인하는 것은 안다'?
  • 房家 2009/12/10 22:44 #

    '안다' -> '아니다'로 수정했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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