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21 01:53

죽음을 통해 본 일본종교의 생명관 얻어 배우는 인생

지난 주말에 참석한 학회(사진의 원불교 건물에서 열렸음)에서 박규태 선생님의 “일본인의 생명관: 계보적 일고찰”이라는 발표를 들었다. 울림이 남는 발표였다. 주제는 생명인데 다루어진 것은 주로 죽음이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삶의 문제를 주로 죽음을 통해 성찰했다는 커다란 전제에 입각해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든다. 발표하신 선생님의 삶의 경험에서 죽음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 요즘의 절실한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죽음에 대해 심혈을 기울인 이 글을 쓰게 되신 것은 아닐까? 물론 잡생각이다.
일본과 같이 복잡한 문화의 이천년간의 죽음관을 한 편의 논문으로 다루다니, 이건 너무 무모하다는 것이 나의 상식적인 견해다. 이건 책 서너 권을 써도 모자를 듯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작업을 했다. 그 열정에 기가 질린다. 방대한 자료들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잘 정리되어 있다. 특히 각 소절의 첫 대목들이 내 눈길을 끈다. 이것들은 절에 전개될 내용의 요약적 소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색의 언어라는 느낌도 준다. 학술적인 언술의 느낌이라기보다는 ‘생명이란 이런거라네...’라고 말을 건네는 현인의 이야기의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뒤에 나오는 자료들의 핵심을 적절히 요약하는 말이어서 자료와 성찰의 조화가 절묘하다. 공이 깃든 언어들, 그 문장들을 모아서 여기 간직해둔다.

1. 생성生成의 생명관: 신도 신화
생명의 문제는 모든 기원의 문제와 이어져 있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전하는 일본 신도 신화는 우주기원신화와 인간기원신화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반면 국토신화와 신들의 기원신화에 대해서는 집요할 정도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2. 무상無常의 생명관: 불교
생명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것은 무게를 잴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무상하다. 그것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진동하며 유동적인 물결의 흐름 같은 것이다. 거기서 표면의 거품을 보는 자라면 아마도 생명은 덧없고 헛된 꿈같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수면의 깊이를 보는 자라면 그렇게 허망한 수사학에 쉬이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을 성싶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떨까. 부유하는 일본인. 그들에게는 수면과 수심의 차이는 사실상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3. 무욕無慾의 생명관: 유교와 모노노아와레
생명은 욕망의 집이다. 욕망으로 쌓아올린 벽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곳에 생명은 더 이상 거하지 않는다. 욕망을 부정하는 종교라 해도 실은 또 다른 빛깔의 벽돌을 바꿔쌓기 하는 작업이 아닐까? 구원받고 혹은 구원하고자 하는 거대한 욕망의 벽돌 말이다. 어쨌거나 생명력은 크고 작은 욕망이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친다.

4. 체념諦念의 생명관: 국학과 무사도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과 생명을 체념한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생명의 포기에는 모든 욕망과 의욕의 상실이 뒤따른다. 그런데 인간은 때로 욕망을 접을 줄 아는 체념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인은 체념(諦め, 아키라메)의 달인이다.

5. 무사無私의 생명관: 우주대생명과 다이쇼생명주의
일본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여다볼 때마다 ‘나’(私)라는 자의식이 주체 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게 된다.……그것은 무아無我라기보다는 무사無私에 가까운 심리적 경향성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생명은 과연 나의 것인가? 어쩌면 나의 생명은 더 큰 생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작은 생명일지도 모른다. 근현대의 많은 일본인들은 이런 더 큰 생명을 전술한 ‘우주대생명’ 혹은 ‘근원적 생명’ 등으로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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