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0 02:50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평문 얻어 배우는 인생

한 행사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글을 남긴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고 김진호 선생님의 “교세 감소와 정치 세력화, 위험한 만남”이라는 글을 논평하기로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자리는 쟁쟁한 학자들로 가득 찬 행사였다.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행사여서 일반적인 소박한 발표와는 많이 달랐다. 발표회의 화두를 제공한 책 <위도10도>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에는 나의 논평문만 남긴다. 사실 발표문이 없는 이 논평문이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발표자의 양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표문은 실을 수 없었음.) 대부분 발표 내용을 긍정하고 중요한 점을 다시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기념용 포스팅. 


“교세 감소와 정치 세력화, 위험한 만남”(김진호)에 대한 논평

1. 한국 개신교의 정치성, 뜨거운 이슈이지만 잘 정돈된 학계의 작업은 만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현재진행형인 사안을 전망하는 데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교계 현실에 대한 감각과 학문적 깊이를 겸비한 선생님의 글을 읽고 공감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현장감과 균형감의 결합은 <위도10도>의 미덕이기도 합니다.)

2. 글의 현실 인식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1990년대 개신교 인구의 정체를 교회 변화의 중요한 기점으로 잡은 것, 1990년대 교계 여러 방면에서 일어난 보수화,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로서 정치세력화가 진행된 것은 탁월한 밑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농축되어 있어 묻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이 자리에서는 절제하도록 하겠습니다.개인적인 의견으로 ‘1990년대 어간’은 ‘1920년대 어간’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근대화의 선두 주자로 인식되던 기독교가 삼일운동의 좌절 이후 (비정치화를 앞세운) 교단의 보수화와 시대에 뒤쳐진 이미지, 교인수의 감소, 노령화와 사회비판적 세력의 유출 등이 겹쳐집니다. 이 자리에서 상세히 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는 비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3. 교회의 문제/필자의 문제약간 혼돈될 수 있는 것은 대응전략(직접 대응은 아니지만 위축된 자의식에 대한 실마리로서 기능하는 것이라고 미묘하게 정외됨)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 글이 인과관계의 서술로 읽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사회 환경 변화와 교회의 지체(교회가 덜 매력적으로 됨) -> 교인 감소 -> 성장 위주의 경향과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몰인식 강화 -> 정치세력화 -> 교인 감소? 종교전쟁?
글의 목적이 교회 성장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교회가 성장했는가?’라는 잘못된 물음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좋지 않은 이해의 예를 들자면, 진보성, 사회적 영성이 교인 회복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개의 문제가 겹쳐져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는 “교인 감소의 극복”[교회가 추구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사회적 공공성의 확대”[필자가 추구하는 문제]인데 이 둘이 겹쳐지지 않게 글의 흐름을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4. 교회 성장, 번영신학속된 궁금증이 생깁니다. 교계의 위기 때도 “대형교회의 성장 추세는 결코 시들지 않았고” 결국 번영신학이 풍미하며 “대형교회가 교단 장악력을 갖추게” 됩니다. 글의 논지에 비추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요? 번영신학은 ‘후기 자본주의’라는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학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인지?
(음미할만한 표현들: “미국적 번영신학이 한국 대형교회의 신앙을 실례로서 흡수”, “한국적 부흥회 신앙 같은 아웃사이더적인 요소가 주류적 가치와 절묘하게 결합”)

5. “개신교는 늘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였다. 정교분리라는 법적이고 신앙적/신학적인 규정이 개신교의 정치적 행위에 큰 장애가 되었던 적은 없다.” 다만 수동적이냐 적극적이냐의 문제일 뿐. 한칼로 시원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대부분의 시각들이 정교분리라는 명목상의 문제에 힘을 소진하고 또한 ‘정치’에 대한 혐오에 기반을 두고 논지를 펴는 것에 비하면, 이 글은 이 부분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핵심적인 지점으로 바로 들어가는 미덕을 보입니다.
<위도10도>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 “종교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무슬림의 노력. “복음주의가 미국의 대외 정책에 굵직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 데 역할을 한 프랭클린 그레이엄. 종교의 정치 개입 자체를 비판하기 보다는 냉철하게 묘사.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춤.
[이 대목에서 막 던지는 질문] 장로 대통령(김영삼)의 실패가 개신교 정치세력화를 더욱 본격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글의 지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고 예상할 수 있는지요? 지금은 제2차 장로 대통령의 실패가 임박한 시점입니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만든 대통령'이라는 식의 언급이 극도로 자제되고 있죠.) 1990년대 이후와 내년 이후의 비슷한 점과 전망은?

6. 맺음말에서 개신교의 정치세력화를 종교전쟁과 연결 짓습니다.자리가 자리인지라 <위도10>의 독자로서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책에서 묘사된 죽고 죽이는 전쟁과 비교할 때 이 글의 전쟁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요? 글의 전쟁은 다소 비유적이거나 추상적이라고 생각됩니다.(‘담론’이라고 표현) 이 담론으로서의 전쟁은 실제적인 전쟁으로 발전될 단초라는 의미인지요?

7. 다음과 같이 질문을 구체화하겠습니다. 적으로 해석된 ‘타자’의 얼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이 글은 정치 세력화하는 한국 개신교의 내적 논리를 충실하게 보여줍니다. 외부의 위협(자존성을 해체시키는 요소들)이 그들 세계관 내에서 어떤 신앙의 언어로 번역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 보면 이것은 싸움의 한쪽 당사자만의 시선에 고정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위도10도>에서 싸움의 양편, 그리고 제3자의 입장을 골고루 들었던 것에 비교하면 글에서는 한 싸움꾼의 이야기만 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싸움꾼의 시선이기에 ‘우리’와 ‘적’은 내부와 외부(우리 밖의 모든 것)의 대결 구도만 보일 뿐 적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개신교에 적대적인 사회 환경 전반? 글의 범위를 벗어난 질문일수도 있지만, 한국 사회라는 싸움터의 전체 지형을 조망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이 적의 존재는 어떻게 묘사될 수 있습니까? 혹시 다른 종교가 그 대상으로 드러나는지요? 이 글과 책을 연결시켜 생각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8. 행위자들이 서로 머무를 수 있는 비무장지대의 설치, 적을 이웃으로 만드는 정치를 제안한 맺음글에 동의합니다. <위도10도>에서 관련된 구절을 인용합니다.(1) 필자의 결론에 대항할만한 논리: “저는 서양인들이 운운하는 상대주의에 정신을 빼앗길 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나이지리아 쿼시 주교)(2) 그러나 그러한 공격적 논리를 극복한 다른 증언: “신이 인간을 다르게 창조하신 까닭은 차이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섭리였다.”(나이지리아 이맘 아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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