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1 23:59

터너 주교의 정치적 입장 기독교세계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의 다수는 일본의 지배를 승인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선교사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연구가 지배적이다.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서양인들이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일본의 힘의 우위를 인정한 것은 어찌 보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 한국인을 사랑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성공회의 2대 주교였던 아서 터너(한국 이름: 단아덕)에 대한 평가에도 나는 민족주의적 평가의 덧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07년부터 YMCA 회장을 역임하면서 종로YMCA 건물을 건립하는 등 기여를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을 한 인물로 함께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글.




그가 YMCA 회장으로서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정치적 성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재정의 <<대한성공회 백년사 : 1890-1990>>(대한성공회 출판부, 1990)는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나는 다른 연구보다는 이 책이 신뢰할만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의 진술이 일차자료(대한선공회 기관지인 Morning Calm)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모닝 캄>을 검토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숙제가 남아있는 셈이긴 하지만, 이재정의 책에서 필요한 내용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 성공회 선교는 영미동맹이라는 정치적 환경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터너의 활동기간(1905-1910)은 이 점이 두드러진다. 그렇기에 터너는 부임할 때부터 한국선교뿐 아니라 한국 내 일본인 선교를 선교 명분으로 강조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현재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람’입니다.……적어도 두 사람의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기고하였다.……여기서 말씀드리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서울에서 저를 도와줄 사제이고 다른 한 명은 일본인들을 위한 선교에 책임질 사람입니다.”(1905)

을사늑약에 대한 그의 평가는 ‘잘한 일’이었다. 사후처리가 매끄럽지 않아 다만 한국인의 반발을 일으켜 시끄럽게 된 것이 탈일뿐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상당한 이유에서 (일본 정부가)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옳던 그르던 간에 한국 백성들을 평화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1907)

1905년 이후 한국의 정치적 절망 상황은 많은 교인들을 개신교로 이끈 계기였다. 성공회도 이 시기에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터너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나의 이해로는 비록 그들의 동기가 잘못이라 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쏟아 놓고 있는 바람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오늘의 운동을 바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게으름으로 인해 놓치는 결과가 될지도 모릅니다.”(1906)

당시의 의병운동은 선교사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테러리즘을 비추어졌기 때문에. 터너는 극한 표현은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인식을 가졌던 것 같다. 강화도에서 의병 때문에 일본 경찰의 검거가 있었고, 교인이 성당에 피신한 사례가 있었다. 터너는 이들을 받아주기는 했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의 처리가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피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마 주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전체적으로 전혀 일반 주민들에게 잔혹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다만 개별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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