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2 00:25

성공회 선교사가 본 한국 문화 기독교세계

1월말에 양화진문화원에서 “성공회 선교사가 본 한국 문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라 준비하면서 공부가 많이 되었다. 특히 랜디스라는 중요한 선교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꽤 큰 무대였는데 별 탈 없이 끝낸 것에 만족한다고 자평한다. 수준 높은 강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준비한 내용은 다 털어놓고 나온 기분. 강연 원고 내용은 매우 소박하다. 연구를 했다기보다는 중요한 연구 분야에 입문하면서 기록한 내용이랄까.

원고3_Bang.pdf
강의 화면 PPT3_1.pdf PPT3_2.pdf


제3강. 성공회 선교사가 본 한국 문화


1. 머리말
1-1. 성공회라는 교단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오른쪽 가장자리인 I열에 성공회 선교사 묘비들이 서 있다. 묘역을 한 바퀴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한번 쳐다보고 지나치는, 다른 구역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곳이다. 더구나 이 구역의 무덤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지 않아 하나하나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며, 선교사 무덤과 한국인 평신도의 무덤이 공존하고 있어 무덤 배치도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우연이겠지만 양화진에서 성공회 묘역의 위치는 우리가 성공회에 대해 갖는 관심과 앎의 정도와 상응한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대한성공회에는 100여개의 교회와 5만여 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다른 교회에서 보기엔 작은 수이다. 그러나 성공회가 기독교계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수로 표현되지 않는다. 성공회는 초기부터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토착화된 견실한 교단 조직을 발달시켜 왔으며, 정치적으로는 기독교 내의 진보적인 목소리를 대표하는 교단으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강연에서는 성공회의 토착화의 전통에 주목하면서,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문화에 대해 가졌던 관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2. 성공회 선교 역사
성공회의 한국 선교는 1890년 코프(Charles John Corfe, 고요한) 주교의 입국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코프는 영국을 출발하기에 앞서 선교 잡지 <모닝 캄Morning Calm>을 발간하였고, 한국에서는 인천과 서울, 그리고 강화도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였다. 초기부터 고프 주교와 활동한 선교사로는 랜디스, 트롤로프 등이 있다. 또한 1892년에 이미 4명의 수녀들이 입국하여 수녀원의 기초를 닦았다. 선교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수는 다른 교단에 비교해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표1 참조) 그러나 근무지 변경, 질병이나 개인적 원인에 의한 귀국, 사망 등 인적 사항의 변동이 잦은 편이어서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 이는 많지 않았다.

성공회는 초기에 의료 활동에 주력하였다.(첫 한국인 세례는 1897년에 이루어졌다.) 인천에 성누가병원, 서울에 성베드로병원, 성마태병원을 건립하여 많은 한국인들을 진료하였다. 1895년의 의료 활동 기록을 보면, 북장로회가 3개 병원에서 339명을, 북감리회가 2개 병원에서 116명을 진료하였고, 성공회는 3개 병원에서 795명을 진료하였다. 그러나 코프 주교는 만주 선교 겸임, 선교사와 지원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04년 사임하였다.
제2대 주교 터너는 1905년 서품을 받고 선교사들을 보강하여 교단 재정비에 나섰다. 그의 재임 기간은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인들이 신자로 들어와 교회가 성장하던 시기였다. 교단은 그의 지도 아래 ‘대한성공회’라는 공식 명칭 아래 체계를 잡았지만, 그는 1910년 병사하였다. 제3대 주교 트롤로프는 1911년에 서품을 받고 1930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성공회를 이끌었다. 그는 신학교를 건립하여 교회 자립의 기초를 놓았으며, 1926년 서울대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이상의 대한성공회의 역사 개관과 이하의 터너 주교에 대한 내용은 주로 다음 책을 참고한 것이다. 이재정,  <<대한성공회 백년사 : 1890-1990>>(대한성공회 출판부, 1990).



2. 양화진에 묻힌 성공회 선교사
현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I열에 묻혀 있는 성공회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생몰연대(한국 활동기간)
주요 활동
터너 / 단아덕端雅德Arthur Beresford Turner
1862-1910
(1896-1910)
제2대 한국주교(1905-1910)
교회의 성장과 자립을 위해 노력: 선교범위 확장(수원, 진천), 교회 체계 형성
YMCA 창설시 초대 이사,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장 역임
카트라이트 Stephen Hayter Cartwright
1874-1909
(1907-1909)
일본 성공회 선교사로 활동하다가(1902-6), 1907년 내한
웹스터 Elizabeth Webster
1856-1898
간호원. 1898년 별세
노라 Sister Nora
1849-1919
성베드로 수녀회 소속으로 1892년 내한,  간호원으로서 의료선교를 지원. 이후 서울에서 고아를 돌보다가 1919년 별세.
로이스 Lois

수녀, 1899년 별세
허지스 / 허세실許世實
Cecil Henry Noble Hodges
1880-1926
(1911-1926)
1914년 강화읍에 성미가엘신학원 설립, 10년간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힘씀.
차드웰 / 차애덕車愛德
Arthur Ernest Chadwell
1892-1967
(1926-1963)
진천, 배천, 평양 등지에서 활동. 해방후 다시 내한하여 활동. 은퇴 후에도 인천성당에서 1년 봉직하고 부산에서 별세
구드윈 / 구두인具斗仁
Charles Goodwin
1913-1997
(1960-1979)
신약학, 고전학자로서 성미가엘신학원과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강의. 성서원어와 한국어 비교연구에 공헌.


2-1. 터너
터너는 1896년부터 서울과 인천에서 활동하며 코프 주교를 보좌했고, 코프 주교의 사임 이후 제2대 주교로 활동하였다.(1905-1910) 그의 재임 기간은 정치적 어려움에 처한 조선 민중들의 기대가 기독교에 투영되어 교회가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 성공회는 수원과 진천까지 교세를 확장하였고, 본국의 미비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여 토착교회를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다음은 성장 상황에 대한 그의 글이다.

“나의 이해로는 비록 그들의 동기가 잘못이라 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쏟아 놓고 있는 바람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오늘의 운동을 바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게으름으로 인해 놓치는 결과가 될지도 모릅니다.”(1906)

성공회 초기 선교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은 영일동맹이라는 정치적 환경 안에서 이루어진 선교 활동이라는 것이다. 한국 내의 일본인을 위한 선교가 처음부터 한국 선교의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정치적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터너가 주교 취임 직후 쓴 글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람’입니다.……적어도 두 사람의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기고하였습니다.……여기서 말씀드리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서울에서 저를 도와줄 사제이고 다른 한 명은 일본인들을 위한 선교에 책임질 사람입니다.”(1905)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위한다고 해서 현재 우리의 정치적 견해와 동일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시 다른 선교사들처럼 터너도 구한말의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갖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정치적 견해 표명에 신중해야 하는 그의 지위도 고려되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일본에 적대적이지 않은 입장이 고수되었다. 강화도에서 의병 검거와 관련된 소동이 있은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피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마 주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전체적으로 전혀 일반 주민들에게 잔혹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다만 개별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1908)

터너의 다른 중요한 활동은 YMCA의 창설 멤버였고 1907년 이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장을 역임하면서 종로 YMCA회관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축구를 가르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영국 출신 선교사들에 어느 정도 공통되는 것 같다. 다음 글은 터너에 대한 글은 아니지만 초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사진은) 강화학교 축구팀으로,  브라이들(G. A. Bridle) 목사가 몇 년간 공들여 연습시켰다. 소년들은 축구를 매우 잘 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연습한 후에는 영국의 리그 경기에 참가할 실력을 갖출 것이다. 정말로 그들은 축구 선수로서 전혀 꿀릴 것이 없다. 나는 그들이 크리켓 경기를 하도록 소개하고픈 바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 게임에는 익숙지 않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1901)

2-2. 허지스
허지스는 1911년 내한하여 수원에서 일하다가 1914년 강화읍에 성미가엘신학원(성공회대학교의 전신) 설립하고 이후 10년간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힘썼다. 신학교 설립은 트롤로프 주교가 핵심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었는데, 그 결과 191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김희준, 구건조)가 배출되었다. 그의 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최근에 번역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에 자신이 쓴 글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교육은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와 교감하는 상호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 문화에서 그가 기독교인으로서 느낀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영국에서 교회 안에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것을 망각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 영리해져서 악한 귀신에 사로잡히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감사할 것은 한국인들이 그처럼 영리하지 않아서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우리 주님의 약속과 능력을 좀 더 단순하게 믿는 믿음을 구하게끔 만든다.” 세실 허지스 외, 안교성 옮김,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살림, 2011), 39.


학생들과의 대화도 흥미로운데, 다음은 왜 기독교인이 되었냐는 질문에 대한 한 신학생의 답변 내용이다. 

“자기 어머니가 별을 향해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는데, 그것을 보고 자신도 언덕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기독교 예배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기도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과연 기독교인에게 기도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려는 바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실 허지스 외,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69-70. 이 외에도 허지스는 한국 신화를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적 제언과 사례를 제시한 글을 쓰기도 했다. Cecil H. N. Hodges, “A Plea for the Investigation of Korean Myths and Folklore” 



3. 종교 없음의 진술: 한국 문화와의 첫 만남
우리는 언어라는 사유의 틀 속에서 사유한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종교현상에 대해 ‘종교religion’라는 서양 언어의 틀 속에서 사유하였다. 종교라는 언어도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산물이고 문화적 전제의 제약 속에 존재한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언어적 틀의 한계를 느끼고 재성찰을 통해 그것을 수정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즉,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한국 문화에 종교라는 말을 적용하지 못했고, 거의 20여년이 걸려서야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은 종교라는 언어를 인간 경험을 보편적으로 설명하는 언어로 다듬어가는 종교학적 성찰의 과정이기도 하다.
성공회 선교사의 초기 기록에도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패러다임의 적용을 받는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성공회 선교의 시작을 1890년으로 이야기하였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선교의 시도가 있었다. 공식 선교 이전에 중국 푸조우에서 선교하던 울프(J. R. Wolfe)가 1885년에 서울을 방문하고, 1886년에 부산에 선교본부를 임시로 개설했다가 철수한 적이 있었다. 울프가 서울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은 종교 건물이 없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는, 당시 서양인들의 전형적인 종교 없음 서술에 속한다.

“나는 이 나라 어디에도, 혹은 서울 내의 어디에도 우상이나 우상을 모신 사원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놀라웠다. 사람들은 우상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신들을 위한 사원을 세우지 않는 것 같았다. 도시 전체에 사원이 없었다. 한국인에겐 실질적으로 종교 체계가 전혀 없다.”(1885)

코프 주교가 선교하러 출발하면서 발간한 <모닝캄> 창간호에는 한국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는 서양에서 한국에 대해 유통되던 한정된 지식들을 취합하여 작성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기사의 많은 부분은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을 인용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기독교의 온전한 힘을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 예수, 로마, 그리스 혹은 개혁교회 등 어떤 형태의 종교도 한국의 이교도들 앞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종교에 관한 내용은 어느 외교관의 언급을 인용한다. 

종교에 대해 말하면 “한국인에게는 거의 없다.”는 것이 17세기에 한국에 표착하여 오랜 세월을 보낸 네덜란드인이 내린 판단이다. 나뭇가지에 묶인 천, 산등성이의 돌무더기, 나무에 걸린 긴 밧줄, 길가에 위치한 2, 3피트 높이의 사당,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것으로는 한 쪽을 거칠게 썰어내고 채색해 인간 얼굴을 표시하고 무섭게 튀어나온 이빨을 달아놓은, 땅에 설치된 두꺼운 판자의 모습으로 산신령에 바치는 제물을 통해 한국인에 대한 미신의 영향력을 볼 수 있다. 이 형상들은 적을 마을에서 몰아내어 사람들을 적의 주문과 마법에서 보호하려는 의도를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이들 몇몇 물건과, 서울 북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위에 새겨진 멋진 불상 근처의 작은 절 외에는 한국인들에게는 어떠한 종교적 감정의 흔적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는 ‘종교 이전’의 패러다임으로,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유하던 인식이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한국을 방문한 성공회 선교사들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였고, 결국 이런 인식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 강연에서는 랜디스와 트롤로프를 한국 문화를 탐구한 대표적인 예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4. 랜디스
랜디스는 1890년 인천에 도착하여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성누가병원을 개설한 의료선교사였다. 그런데 그는 ‘성누가병원’이 한국인과는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이름이라고 반대하였다. 대신에 그는 자신이 배운 한문으로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이라는 의미로 낙선시(樂善施) 의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의료 활동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그는 ‘약대인(藥大人)’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
그러나 그는 32세 되던 1898년에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좋아하던 한복을 입은 채로 묻혔다고 전해진다. 현재 랜디스의 무덤은 인천외국인묘지에 있다. 원래 인천 중구 북성동에 조성된 묘지가 현재는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되어 있다. 

랜디스는 짧은 활동 기간 중에 한국 문화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깊이 있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불교에 관한 글
‘The Classic of the Buddhist Rosary’ 봉은사에서 입수한 <목환자경木槵子經>을 번역한 것. 파유리왕이 근심과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부처가 108개 번뇌를 상징하는 염주를 만들어 항상 지니라고 명령하는 내용. 그는 한국의 절에 이 경전이 도표의 형태로 붙어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Buddhist chants and processions’ 예불 드릴 때 외우는 기도의 내용을 번역한 것

(2) 유교 의례들에 관한 글
‘A royal funeral’ 왕가의 장례
‘Mourning and burial rites of Korea’ 유교식 장례 풍속
‘The capping ceremony of Korea’ 관례冠禮

(3) 무속에 관한 글 
‘Notes on the exorcism of spirits in Korea’ 굿판에서 언급되는 신 명칭 소개. 무속을 종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논문.

(4) 민속에 관한 글
‘Folk tales of Korean children’ 인천 고아원 아이들에게 들은 동화라고 짐작된다.
‘Rules for choosing a name.’ 해명법解名法 문헌의 번역. 이름을 해석하여 인생에 주는 영향을 알아내는 방법
‘Some Korean proverbs’ 100여 개의 속담 소개
‘Numerical categories of Korea’ 한국인의 수 관념 수집
‘Geomancy in Korea’ 풍수지리 지침서의 번역, 도선과 무학의 가르침이라고 전해지는 원칙들을 소개.
‘Rhymes of Korean children’ 한국 어린이들의 동요 12편을 번역, 소개. 


5. 트롤로프
트롤로프는 대한성공회 제3대 주교(1911-1930)로서 교회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늘 강의에서는 한국학자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두어 소개하도록 하겠다. 그는 현재까지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학 저널 <왕립아세아학회 한국지부 회보>의 창간호(1900)부터 주요 편집자 및 필진으로 참여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트롤로프는 1915년에 성공회 선교 역사를 정리한 <<한국 교회The Church in Corea>>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한국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그 중에서 종교에 대한 서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인의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의 기반은 자연숭배, 영웅숭배, 정령숭배, 주물숭배의 기묘한 뒤섞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반 위에서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당시 중국이 소유했던 종교적 관념을 사회적, 정치적 관념과 함께 들여왔다. 그것은 기원전 5, 6세기 경 위대한 중국 선생님 공부자와 제자들에 의해 정경화되고 체계화된 통합적 체제이다. 그 날 이후 한국은 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의 헌신적인 추종자라고 스스로를 자랑삼아 일컬었다.”
“그러나 유교는 흔히 지적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종교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용어의 차원에서, 유교에는 사제직, 대중의 신앙을 위한 사원, 설교, 공적이거나 일반적 예배의 형태가 없다.”

“한국의 불교는 대승불교 혹은 ‘북방’ 학파의 불교라고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이 불교는 순수 불교, 마니교, 영지주의의 (분명히 중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 나온 적지 않은 요소들과 섞여) 기묘한 뒤범벅으로, 버마, 실론, 시암의 남방 불교와는 닮은 점이 거의 없지만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서 1500년 이상 위력을 발휘하였다.”

불교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소 피상적으로 보이지만, 2년 후에 발표된 그의 긴 논문 "한국 불교학 개론Introduction to the Study of Buddhism in Corea"에서는 불교에 대한 상당한 안목을 보여준다. 그는 붓다 개념, 불교 교의, 승가 집단 등 불교학 일반에 대해 상당 수준의 정리된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한국 불교의 특수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불교는 “외부 요소를 체계 내의 것으로 흡수하는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지역 특유의 불교문화를 이룬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불교 사원들에 칠성각(七星閣)과 산신각(山神閣)이라는, 본래의 불교와는 큰 상관이 없는 두 보조 전각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붓다와 보살 개념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한국의 사례를 이용하는데, 특히 속리산 법주사에서 찍은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개론’이기 때문에 그는 한국 불교의 특수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본격적인 논지는 펼치지 못한다. 다만 글 말미에서 다음 네 사항을 제안한다. ①한국 불교사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강화할 것. ②한국의 불교 문헌, 특히 한국에서 어떠한 불경이 소장되고 번역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질 것. ③한국의 여러 사찰들에 대한 연구를 당부. ④한국 사찰의 독특한 가람 배치에 주목할 것.
여기서 가람배치에 대한 언급이 이목을 끈다. 트롤로프가 강화에서 사역하던 시절 지었던 한국식 교회 건물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절과 향교라는 전통적 양식을 활용하여 기독교적 이상을 표현한 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 건축을 주도하였다. 그는 속세와 단계적으로 단절하는 가람 배치의 기법, 배 모양의 건물 형태, 연꽃과 같은 상징의 사용, 무엇보다도 전통 한옥과 바실리카 양식의 놀라운 결합을 통해 토착화 양식의 걸작을 건축하였다. 그의 불교 이해가 이 건축물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6. 맺음말
작지만 큰 교단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해도 좋을 듯싶다. 성공회는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진보성을 갖는 독특한 속성을 갖는다. 아마 선교사들은 제대로 된 전통 계승으로부터 참다운 창조가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이 아닐까 한다. 성공회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실을 기하면서 탄탄한 전통을 오늘날까지 유지해 왔다. 현재 대부분의 한옥 성당은 새로 지은 현대식 성당과 나란히 서 있다. 이는 전통을 파괴하지 않고 현재의 맥락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성공회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전통이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는 것임은 쉽게 느껴진다.
한국에 전념한 선교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성공회 선교사들은 동료 선교사들에 견주어 볼 때 한국문화에 대한 최고 수준의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 수준을 넘어 학문적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으며 한국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지금은 완전히 한국인의 교회가 된 대한성공회에서 선교사의 역할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그들의 애정으로부터 나온 성취는 교회 전통으로, 한국학 연구로 계승되고 있다.


덧글

  • Esperos 2014/02/02 01:25 # 답글

    4번 항목, 랜디스 편에서...목환자경은 지금도 불교용품 판매점에서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던데 구한말에도 염불 복덕 차원에서 강조된 경전인가 보군요. 랜디스도, 트롤로프도 매우 학자적인 관점에서 많이 접근했나 보네요. 서양인 선교사들의 '종교 없음 보고'에 대한 이야기를 보니 생각나는데, 방 박사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서양인들의 '종교 없음 서술'에 대한 설명은 제 종교에 대한 인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요.
  • 房家 2014/02/02 22:23 #

    목환자경에 대해서는 저도 랜디스 덕에 처음 알았습니다. 언제 목환자경을 토대로 한 도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요. 랜디스는 다른 개신교 선교사와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 불교 염주와 찬불가, 유교 의식, 무속의 굿에 관심을 가집니다. 전례를 중시하는 전통에 속해 있다보니 의례적 차원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눈치를 채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강연을 준비할 때 박사논문 식으로 '종교없음에서 있음으로'라는 식으로 정리할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준비하다보니 좋은 내용들이 많이 나와 식상한 도식은 뒷전이 되었죠. 논문의 그 부분에 대해 Esperos 님같은 분이 이렇게 의미를 부여해주시니 참 감사하네요. 힘이 많이 되었습니다. 좀덕분에 더 잘 다듬어야 겠다는 격려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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