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31 12:00

"죄인이 된다는 것"(Becoming sinners) 앞부분 독서: 발제

로빈스의 책 "죄인이 된다는 것"(Becoming sinners) 앞부분을 다시 정리함. 이전 발제문에서 빠졌던 앞과 뒤의 내용을 붙여서 글의 맥락을 좀더 알아볼 수 있겠끔 정리. 파푸아뉴기니 개종 사례에 대해, 기존의 문화적 틀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혼합말고 다른 표현을 써서 서술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인류학에서 기독교를 다루어온 방식에 대한 진솔한 평가도 볼 만하다.

Joel Robbins, Becoming Sinners: Christianity and Moral Torment in a Papua New Guinea Societ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 i-41.


프롤로그: ‘헤비 크리스마스’와 ‘사람에 적용되는 돼지 법’

우라프민 공동체에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다. 두 집단은 지리적, 사회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 관계를 맺고 지내왔다. 다국적 에너지회사 케네코트Kennecott가 1991년에 이 지역에 진출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케네코트는 윗마을에 기지를 건설하고 임대료를 지급하고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두 마을 간의 격차가 심해졌고, 도덕적인 비난이 오갔다. 1991년 크리스마스에는 두 마을 간의 축구 경기가 취소되었고 양쪽 마을 교회가 각자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불화가 해결되지 상황은 강한 도덕관을 지닌 우라프민 사람들에 부끄러운 일이었고, ‘헤비 크리스마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무겁다’는 것은 죄에 빠지게 하는 도덕적 실패를 뜻했다. 
해결책으로 물물교환을 통해 부끄러움이나 분노를 사는 것이 제안되었다. 교환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을 위한 돼지 법’이 제안되었다. 돼지 법은 돼지가 마을에 들어오면 바로 죽이는 엄격한 관습이다. 사람들은 ‘기독교 표준’에 따라 살 것에 합의하고 관청에 (상징적으로) 새로운 법으로 등록하였다. 물물교환은 성공적이었고 헤비 크리스마스는 기억 속에만 남았다. 
우라프민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삶을 기독교 도덕의 용어로 사유하게 되었는가? 왜 도덕주의적이고 강력한 형태의 기독교를 택했을까? 토착의 도덕체계는 어떻게 존속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두 문화논리를 살아가는가?


서문: 기독교와 문화 변동

우라프민(Urapmin) 사람들은 1977년 이후 전통 종교로부터 기독교로 전환하였다. 인간의 죄를 고백하고 개종하며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는, 카리스마와 부흥회와 재림의 임박이 강조되는 서구 유형의 교회였다. 왜 이런 개종이 일어났을까? 기존 학계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식민주의의 지원을 받은 강렬한 선교 노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와 소외를 경험한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라프민 사례는 다른 설명을 요구한다. 그들은 기독교를 전적으로 새로운 문화로서 수용하였다. 그들은 전통 문화라는 직물에 기독교라는 헝겊조각을 기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오롯한 의미 체계로 정립하였고 이를 통해 삶 여러 영역을 이끌 수 있었다. 이 사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전 문화의 정합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문화 논리를 그렇게 빨리 이해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 결과 발생한 양면적 문화를 살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문화 변동 이론이 요구된다.

문화 변동에 대하여
문화는 가치와 범주(혹은 상징이나 표상)의 집합이며, 가치와 가치의 관계, 범주와 범주의 관계, 가치와 범주의 관계들이다. 구조주의 성향이 강한 문화 정의 위에서, 저자는 한편으로는 살린스의 구조주의 역사 인류학 작업에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몽의 접근을 차용하여 이론을 구성한다.
살린스(Marshall Sahlins)는 변동을 설명하는 구조주의 이론을 제시한다. (1)사람들은 문화적 구성물을 세계를 지칭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작동하게 한다. ‘국면의 구조’(structure of conjuncture)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문화적 범주의 실천적 현실화를 의미한다. 세계가 사람들의 이해와 행위의 기반이 되는 범주들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범주들은 잡아당겨져 변화한다. 국면의 구조는 문화적 범주들이 새로운 기능적 가치를 획득하는 도가니가 된다. 이 경우 범주들 간의 관계는 손상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성공적인 적용을 통하여 전통적인 문화적 이해를 재생산한다. 동화(assimilation) 모델. (2)‘구조적 변환’. 범주뿐 아니라 범주들 간의 관계가 변화하는 상황. 하와이 터부 시스템의 변화가 그 예이다. (3)사람들은 어느 정도가 되면 전통적 범주로 세계를 언급하여 문화를 재생산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살린스는 이를 ‘근대화’라고 부른다. 그는 사람들이 전에 가졌던 것, 지금까지 좋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증오하게 되는 ‘굴욕humiliation’의 상황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채택(adoption) 모델이라 부르며 두 가지 쟁점을 보완한다. (3-1)어떻게 ‘비하’가 발생하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사람들이 굴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기존 문화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3-2)새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전통 문화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두 구분되고 반대되는 문화들을 동시에 살아가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변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치는 사람들이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의 문제이다. 문화 변동에서 도덕의 역할이 책의 주제이다. 전통 문화체계와 새로 채택한 문화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덕은 그들이 살아가며 겪는 모순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해준다.

우라프민의 굴욕과 변화
우라프민 사람들은 민 지역의 전통적인 의례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급격하게 역할을 상실하였다. 식민지배 이후 그들의 도덕 체계의 변화를 겪는다. 스테이션 위치에서 많이 떨어진 우라프민 사람들은 경제적 행정적으로 주변화되었다. 전통적으로 도덕성에 집중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식민지배 진행과정의 변화는 도덕적 기준에서 굴욕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기독교 문화 연구에 대하여
“(인류학자들은) 기독교를 고유한 지역 문화보다는 식민주의의 산물로 본다.” 
“기독교는 언제나 외부의 힘으로, 인류학 본연의 주제를 위협하고 부패시키고 기껏해야 그 위에 덮인 먼지였다. 그것은 ‘문화적’일 수 없다.” 
“나는 현장에서 카틀라족 종교를 연구하면서, 조상 영에게 드리는 이교적 희생을 보는 대신에 평범한 개혁교회 예배에 앉아 있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기독교 결혼식이나 견진성사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태평양 지역 기독교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의 언급들이다. 기독교는 인류학에서 주요 주제였던 적이 없다. 왜 그럴까? (1)하딩은 기독교가 혐오스런 문화적 타자라고 지적한다. 인류학자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인류학의 기반인 근대성을 거부한 종교이다. (2)기독교가 서구에 기원을 두었다는 사실은 인류학을 배양한 타자성을 침해하는 위협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다. (3)문화적 정통성을 추구하는 인류학자들의 성향.
그래서 어떤 인류학자는 기독교화를 문화적 손실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어떤 인류학자는 주민들의 기독교적 진술을 진지한 의미가 없는 클리세나 불완전하게 이해된 단편들로 본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독교가 사실상 전통 종교가 새로운 옷으로 변장한 것임을 강조하며 기독교를 혼합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진술의 예: “사회적 문화적 항상성의 한 모델로서, 혼합현상은 오랫동안 원래의 내적 의미와 가치 체계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외부 형태를 차용함으로써 원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보존하고 위협 아래 생존하게끔 도와준다.... 기독교에서 빌려오거나 나란히 시행되는 혼합적 실천 아래에는 기독교 이전의 토착적 가치와 믿음이 심리적 생활, 감정적 지향, 근본적 태도로 잘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독교를 문화적인 것보다 못한 어떤 것으로, 진정한 연구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화적 용어로서 기독교를 논의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코마로프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츠와나 사람들 중 몇몇 엘리트는 꽤나 ‘정통적인’ 용어로 기독교를 수용하였으나 연구의 초점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복음에서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과 ‘창피하게 여겨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거부한’ 사람들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기독교에 어떻게 저항하였는가가 초점이 되었고 그들 삶에서 기독교가 한 역할의 문화적 측면은 주제가 아니었다.

왜 멜라네시아에서 오순절교회와 카리스마적 기독교가 인기를 끌었을까? 드라마틱하고 성령이 충만한 의례, 밀레니엄에 절박성 등에서 이 지역 종교들과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도 답의 일부가 될 것이나.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이용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순절교회는 기독교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지역화할 수 있었고, 그렇게 제도적으로 탈중심화 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본부가 있는 교회에서 주변적 지위를 갖도록 사람들을 이끌지 않은 것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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