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01 17:17

종교가 답해주는 물음 종교학공부

곡식 창고가 무너져 깔려죽은 사람 이야기는 아잔데인의 주술에 대한 에반스 프리차드의 설명에서 등장하는데, 내가 참 좋아하는 부분이다. “종교가 답해주는 물음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주제에 대해서 구체적이면서도 명징한 깨우침을 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로, 언젠가 어느 개론 책에서도 보았던 것 같다. 더글러스 책에서 만난 이 부분을, 꽤 길지만 그냥 죽 옮겨보았다. (에반스 프라차드의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글러스 책에서 옮김.)


낡고 썩은 곡식 창고가 무너져내려 그 그늘에 앉아있는 사람을 죽게 했을 때, 그 사건은 마법의 탓이 된다. 아잔데 사람들은 낡고 썩은 창고가 무너지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사람이 몇 시간씩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다보면 날이 흐르고 흘러 창고가 무너질 때 압사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납득한다. 이 일반적 규칙은 자명한 것이고 대단한 고민 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분리된 과정이 한 지점에서 만난 독특한 사건의 발생이다. 창고 아래 아무도 없었던 때도 많았고 창고는 피해 없이 아무도 죽이지 않고 무너질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창고 아래 앉아있었던 때도 있으며, 그가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그들을 사로잡는 문제는 딱 그 때 창고가 쓰러졌냐는 것이며, 왜 딱 그 순간에 다른 사람은 거기 앉지 않았냐는 것이다... 기술적인(technical) 정보에 의한 설명이 한계에 달했을 때, 궁금증의 초점은 대신에 특정한 인물이 우주와 어떤 관련을 갖는지에 대해 맞추어지게 된다. 왜 이 일이 그에게 일어났는가? 그는 어떻게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실수인가? 물론 이 질문들은 유신론적인(theistic) 세계관에 적용된다. 마법(witchcraft)의 경우, 이 질문들은 영들에 관련해 대답을 얻는다. 일반적인 계절의 진행, 구름과 비의 관계, 비와 수확의 관계, 가뭄과 전염병의 관계 등은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해결되어야 할 보다 개인적이고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배경으로 당연시되는 것들이다. 아잔데과 같은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중차대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왜 이 농부는 흉작인데 이웃 농부는 그렇지 않은가? 왜 이 사람은 야생 들소에 들이받혔는데 같은 팀 동료는 무사할까? 왜 이 사람의 아이만, 혹은 소만 죽을까? 왜 나에게만? 왜 오늘인가? 이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까?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90.)

일차적으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이른바 ‘원시인’의 주술에 대해 갖는 편견을 깨준다. 우리는 흔히 주술을 원시인들이 과학적 지식이 모자라 자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의적 조작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프레이저에 의해 널리 퍼진 생각이다. (주술과 종교는 과학 이전의 단계!) 위의 아잔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도 자연 현상의 원리를 알고 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 충족하지 못하는 ‘왜’에 대한 것이다. 왜 하필 그 시간 그 시점에 창고가 무너지는 사건과 사람이 그 밑에서 쉬고있는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였는가? 바로 그 ‘왜’에 대하여 주술적 설명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아프리카 주술에 대한 이해를 넘어 종교 일반에 대한 설명이다. 종교가 대답해주는 것이 ‘왜’에 대한 부분이다. 그것은 과학적 설명이 해줄 수 있는 범위 너머의 질문이다.
비슷한 다른 이야기를 보자. 역시 아프리카 주술에 대한 서술에서 가져온 이야기이다. 이 대목은 이 책을 번역한 정진홍 선생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이 부닥치거나 경험하는 여러 질병, 불운, 잘못된 일, 사고, 비극, 슬픔, 위험, 불가사의한 불행한 일 등은 사술사나 마녀, 혹은 마법사가 이 신비한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믿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학질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학질모기가 그 아이를 물었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하다 죽었다고 하는 과학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 모기가 다른 이의 아이를 물지 않고 자기 자식을 물었는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만족스러운 유일한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 모기를 보냈다든가, 아니면 자기 자식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악할 주술을 누군가에게 행사했다고 하는 설명이다. 이러한 해답은 물론 과학적인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대답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존 S. 음비티, 정진홍 옮김, <<아프리카의 종교와 철학>> (현대사상사, 1979), 375-376.)

현대의학은 모기에 물리면 어떠한 과정으로 아이가 병에 걸려 죽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왜” 아이가 죽었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대답, 누군가가 아이에게 나쁜 주술을 걸었다는 것이 답이 되며,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굿을 벌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대답과 행위는 종교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아이 잃은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그 대답을 종교의 영역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답해주는 대답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왜에 대한 것이며, 이는 과학과는 다른 차원의 물음과 해답이다. (종교가 과학의 영역의 답변까지 해주려할 때 충돌이 생긴다. 성서를 지구 발생의 과학적 설명으로 삼으려하는 창조과학회의 시도가 그 예이다.) 이성의 시대인 현대에 왜 종교가 사라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위의 이야기들이 그에 대한 답이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아직 사람들이 미몽에 빠진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가 인생의 근원적인 물음에 답을 주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liscinia님의 메모에서 같은 통찰을 발견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나오는 대목이다. (앤더슨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하다.)

“나는 눈이 멀게 태어났는가? 왜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신체가 마비되는가? 왜 나의 딸이 저능아인가? 종교는 이런 의문들을 설명해준다.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진화적이고 진보적인 형태의 사고가 가진 커다란 약점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참기 어려운 침묵으로 대답한다는 것이다.”

덧글

  • luscinia 2006/10/05 17:12 # 답글

    저는 그저 인상적이다 싶어 담아두었을 뿐인데, 방가님 글 읽으면서 찬찬히 곱씹어 볼 수 있었습니다. 번번이 참 고맙습니다.
  • 房家 2006/10/06 00:34 #

    언젠가 정리해두고픈 내용이었는데 계기를 얻었습니다. 좋은 메모에 감사드립니다.
  • ㅎ(히읗) 2006/10/06 21:32 # 답글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대답, 누군가가 아이에게 나쁜 주술을 걸었다는 것이 답이 되며,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굿을 벌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답이라지만 어설픈 답이 되겠군요......푸닥거리를 한다고 장님 눈이 떠지느냐 이겁니다......
  • 房家 2006/10/06 22:24 #

    아니, 어설프지 않습니다. 의학 대신 푸닥거리를 하지는 않는다는 게 위 글의 요지입니다. 아이의 죽음과 같이 푸닥거리를 하지 않고서는 삶이 견디기 힘들 때, 삶의 의미를 정리하고 가다듬는 과정으로서 요구되는 것이죠.
  • ㅎ(히읗) 2006/10/06 22:30 # 답글

    [,삶의 의미를 정리하고 가다듬는 과정으로서 요구되는 것이죠.]

    값싼 위로쯤으로나 읽힙니다......
  • luscinia 2006/10/07 10:33 #

    당사자 장님에게는 그것이 값진 선물일지도...^^
  • ㅎ(히읗) 2006/10/07 10:37 #

    그렇겠군요, 하지만 장님은 눈 뜨지 못하면서 위안만 할 뿐입니다......^^
  • 가고일 2006/10/09 15:17 # 답글

    한가지 생각해 보면 저런 원시종교든 현대의 기독교이든 개체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타자"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나쁜 주술사의 저주이든, 사탄이든, 하느님이든 간에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타자보다는 자기 자신의 "업"을 더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현세에서 고통을 받든 행복을 받든 그 원인은 어떻든 거슬러가면
    나 자신의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죠.
    기독교에서도 스스로의 인과에 대한 결과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중개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전통종교에서는 역사적 영향인지 이 두가지 형태가 골고루 보이는 듯 하군요
    이런 관념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한번 생각해 볼만한 듯 합니다.
  • 房家 2006/10/09 19:06 #

    그렇네요. 인도적 사유는 특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말씀하신대로 기독교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할 여지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 탓하는 기독교인도 있지만 자기 탓을 하는 기독교인도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믿느냐의 문제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미사 시간에 "내 탓이요"라고 외치는 게 얼마나 내면화되는가에 따라서요.

    저는 불교의 업보 관념이 우리 민간 신앙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숙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말씀하신대로 두 생각이 골고루 보이는 것 같아요.
  • 미지의회장 2006/11/01 00:59 # 답글

    주술, 뭐 일반적으로 굿이라고 하죠, 아플 때 굿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단순히 병의 원인을 귀신같은 어떤 비현실적 존재로 돌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글을 읽고나니 저도 간과한게 있었던 것 같네요. '왜 나(혹은 그에게'라는 요소말이에요. 저 글을 읽다보면 그렇구나하며 생각되긴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위에서 볼 때 정말 '왜 나 혹은 그에게'라는 요소가 있는 건가하는 의문도 들어요. 음...'사이에서'란 영화에서 보면 굿을 할 때 조상신들을 불러와서 한을 풀어주는데 이것이 병의 원인인 동시에 '왜 나에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인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글 잘봤습니다~
  • 房家 2006/11/01 20:07 #

    굿에서 한을 풀어주는 것은 인간 관계의 멍든(응어리진) 부분을 풀어주는 사회적인 치료이기도 하고, 불행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의미부여이기도 합니다. '사이에서'에도 그런 측면이 잘 포착되었다고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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