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3 23:24

의례에 대한 알짜 사실들 종교학공부

조너선 스미스의 ‘의례 이론’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음 글을 골랐다. Jonathan Z. Smith, "The Bare Facts of Ritual," <<Imagining Religion: From Babylon to Jonestow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이하의 내용은 이 글에서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들을 뽑고 그것을 다른 사례들을 들어서 해설하는 방식을 취한 한시간 분량의 강의안이다.


1. 대본에 없는 것

1-1. 의례에 관한 두 이야기: 우연한 요소의 개입

[글 처음에 인용된 두 이야기를 그대로 소개하였다. 의례에 우연한 요소가 개입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이다. 우연성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이야기.]
표범들이 갑자기 사원에 들어와 의례용 잔에 든 물을 마셔버렸다. 이 일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의례의 한 부분이 되었다.(Kafka, "Refelctions on Sin, Hope, and the True Way")
제기(祭器)를 운반한 일꾼이 아테네 폴리아스의 여사제 리시마쉬(Lysimache)에게 노새에게 물 좀 먹여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리시마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됩니다. 한 번 그렇게 하면 의례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Plutarch, <<유순함에 관하여(De vitioso pudore)>>)

1-2. 의미의 부여
[위 이야기에 대한 스미스의 설명]
카프카의 이야기에서 표범의 출현은 하나의 메시지(기적, 징조)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관례화와 반복을 통해 의례에 포함되었다. 플루타르크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 있었지만, 여사제는 그러한 잠재성을 거부하고 거기서 신성모독의 가능성을 보았다.(54)

1-3. 성스러움: 상황적 범주
[우연한 것(평범한 것)이 의례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성스러움(의례 내에 존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로 발전된다. 중요한 이론적 논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너무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성스러운 장소는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보이게 되는 명료화의 장소(초점 렌즈)이다. …… 평범한 것은 단지 거기 있음으로써 의미심장한 것이 되고, 성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특별한 방식으로 관심을 쏟게 함으로써, 그것은 성스럽게 된다.(55)

1-4. 의례에 우연성이 개입한 사례
[우연성이 개입한 다른 사례를 찾았다. 도니거 책에서 인용한 사례. 원래 책에서 ‘신화 없는 의례’라는 도니거의 입장은 다소 부정적인 맥락이지만, 스미스 식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사례이다.]
신화 없는 의례의 존재론적 지위는 잊혀진 꿈의 존재론적 지위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한 의례의 한 예는 스페인 유대인의 경우이다. 그들은 박해 하에서 그들의 의례를 가장된 형태로, 은밀하게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세다르(Sedar)를 경축할 때 밖에 조사 당국의 접근을 알리는 보초를 세워놓았고 그 보초들은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태양 아래 테이블을 세워놓고 카드놀이를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유대인들은 실제 의례를 행하지 않게 되었지만 매년 그날에는 밖에 테이블을 세워놓고 카드놀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모르면서도. 다른 이들은 유대교에서 완전히 개종했지만 그들의 새로운 가톨릭 의례를 똑같이 비밀스런 상태에서 계속해서 행했다.(웬디 도니거, 류경희 옮김, <<다른 사람들의 신화>> (청년사, 2007), 280-81.)

1-5. 한국 개신교의 사례
[내 석사논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골랐다. 한국 개신교 의례 형성과정에서도 초기 상황에 의해서 우연히(그 때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의례 내적인 맥락에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개입된 요소들이 의례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주일 예배 때마다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봄과 가을의 특별한 날,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같은 날을 정해서 일 년에서 두 번 정도 실시한다. 이것은 개신교 초기에 성찬식을 집행할 성직자가 적어서 성찬식을 자주 할 수 없었던 상황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동안의 반복된 실천으로 인해 이제 한국 교회의 관행으로 굳어졌고, 성찬식을 자주하면 그 의미가 희석되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을 방지한다는 의미를 획득하였다.
또 한국의 예배 절차에서 독특한 것이 대표기도를 평신도인 장로가 나와서 드리는 절차이다. 세계 교회 예배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이 절차 역시 초기 선교의 상황과 관련이 된다. 원래 개신교 예배의 기도는 목사가 모두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전도 집회나 예배를 인도할 때 언어 구사의 한계 때문에 기도 부분을 평신도에게 일임하였다. 피치 못한 상황에 의해 생긴 이 역할 분담은 이후 반복을 통해 한국 교회의 절차로 확립되었다. 한국 개신교인에게 이는 평신도의 참여라는 의미를 획득한 긴요한 행위로 인식된다. 신학자들의 시정 권고는 이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절차는 의미 있는 의례의 일부분으로서 계속된 실천을 통해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틀어지는 것들을 마름질하기

2-1. 기존의 의례 이해

의례를 희망하는 목적의 주술적 모방, 바뀌어 표현된 정서, 관념으로부터 나온 상징적 행위, 텍스트의 극화劇化 등 다른 무언가와 일치되는 것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의례는 불일치incongruency가 지각되고 그에 대해 사유될 때 힘을 얻는다.(63)
[기존의 의례 이론과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표현이 다소 까다로워서 다른 식으로 설명하자면, 기존의 의례 이론의 관점은 대본(script)과 주서(朱書, rubric)라는 단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의례를 신화와 같이 주어진 스크립트를 따라하는 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기존의 관점이다. 주서(朱書, rubric)는 전례 문헌에 있는 붉은 글씨로, 전례에서 대사에 해당되는 부분은 검을 글씨로, 지문(행동)에 해당되는 부분은 붉은 글씨로 인쇄하는 것이 중세 기독교 전례문의 양식이다. 주서는 의례의 대본의 대표적인 예이다.]


2-2. “의례는 부정합성의 문제와 씨름하는 인간의 작업”
[그러나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전승되어 오는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하는 와중에서 생기는 변형,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유연성과 애드리브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곰사냥 의례에서 나타난 불일치의 예를 들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능력이 의례에서 중요한 것임을 역설한다.]
응당 그렇게 사냥해야 한다고 하는 사냥꾼의 (당위적인) 이데올로기적 언급과 실제로 사냥할 때의 행동 사이에는 간격과 부정합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 이제 우리는 그들이 읽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 불일치를 해소해 나가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간격에 직면하는 바로 이 지점에, 사회의 천재적 재능과 창조성이 위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화, 적응, 조정의 기술이다.
의례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ings are’에 대해 의식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사물들이 마땅히 그래야 할 바the way things ought to be’를 수행하는 수단이다. 의례가 비일상적인 배경에 놓인 매우 일상적인 행위에 관련된다는 사실, 의례가 묘사하고 보여주는 것이 원칙적으로 이 행위들의 모든 발생에 대해 가능하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들에 의례의 힘이 의존한다.(63)

2-3. 퍼포먼스로서의 의례
[돌발상황에서 발휘되는 유연성, 유들이, 융통성을 강조하는 것은 최근 의례 연구에서 의례를 퍼포먼스로 보는 시각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캐서린 벨(Catherine Bell)의 글에서 소개된 바바라 메이어호프(Barbara Myerhoff)의 연구를 인용해 보았다. Catherine Bell, "Performance," in Mark C. Taylor, Critical Terms for Religious Studie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211-12.]
제이콥 코비츠의 아흔다섯 살 생일잔치. 제이콥은 자신의 생일을 통해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 공동체가 모임을 가질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고, 사람들을 열심히 불러 모았다. 보통 때였다면 이 생일잔치는 세속적인 이벤트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생일을 앞두고 제이콥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직감하고, 제이콥은 서둘러 사람들을 부르고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모이게 되어 기쁘고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연설을 마친 후, 그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죽었다. 가족들이 모여 이 행사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를 논의하였다. 장남은 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 모임이 망쳐지지 않았으면 했고, 다들 동의하였다. 가족들은 이 죽음을 생일잔치의 의미의 정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일련의 의례와 같은 행위들과 해석의 과정들을 밟아나갔다. 다시 말해, 그 사건은 그의 삶이 얼마나 충실했으며 의미 있게 끝났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화되었다. 사람들은 “선종(善終)이었어”(It's a good death.)라고 말했다.
[위의 이야기 역시 대본(혹은 주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는 종래의 의례 이론과는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위의 사례에서 다른 측면을 끄집어 이야기하자면 공동체적인 역동성이다. 의례는 사람들이 모이고 엮여서 삶과 공동체에 힘을 불어넣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되긴 했지만, 여전히 유용한 뒤르켐적인 의례 이론이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라는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위의 사례와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을 다룬 영화가 ‘축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 장례식은 산 자들을 위한 날이라는 것, 그들이 모여 삶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공동체의 생명력을 지속한다는 의미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의례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짜 나가느냐는 논의로 나아가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기로 한다.]

2-4. 흥수의 관점에서 본 의례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라는 관점에서 의례를 본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똑바로 살아라>235회를 상영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전에 올린 글 리나와 재환의 결혼식순을 참조할 것.

덧글

  • 지양 2008/04/04 11:54 # 답글

  • 房家 2008/04/04 13:56 #

    정말, 빠진 페이지 없이 전부 나오는군요. 고맙습니다.
  • andy 2008/04/07 18:21 # 답글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으셨네요.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 부분입니다:
    =================================================================================
    또 한국의 예배 절차에서 독특한 것이 대표기도를 평신도인 장로가 나와서 드리는 절차이다. 세계 교회 예배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이 절차 역시 초기 선교의 상황과 관련이 된다. 원래 개신교 예배의 기도는 목사가 모두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전도 집회나 예배를 인도할 때 언어 구사의 한계 때문에 기도 부분을 평신도에게 일임하였다. 피치 못한 상황에 의해 생긴 이 역할 분담은 이후 반복을 통해 한국 교회의 절차로 확립되었다. 한국 개신교인에게 이는 평신도의 참여라는 의미를 획득한 긴요한 행위로 인식된다. 신학자들의 시정 권고는 이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절차는 의미 있는 의례의 일부분으로서 계속된 실천을 통해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
    위 글을 지지해줄만한 레퍼런스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방가님의 시각인지?
  • 房家 2008/04/07 19:59 #

    이 부분은 제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고 주로 다음 글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정장복, "한국 교회 예배 예전 형태 백년," <기독교사상> 318 (1984년 12월), 74.
  • Esperos 2011/02/27 03:10 # 답글

    rubrica를 '주서'라고 번역하기도 하는군요. 제가 읽은 가톨릭의 전례학자가 쓴 책에서는 '홍주'(붉은 주석)이라고 번역했지요. 또한 루브리카에 충실하자는 입장을 '예규주의자'라고 번역했고요. 1570년부터 트리덴티노 교령에 따라 발휘되었던 통칭 '트리덴티노 미사 전례'에서는 성작(성체를 담는 잔) 위를 덮는 판을 성모님으로 상징하여 이를 중간에 제의 속에 감추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시에 잠시 성모님과 떨어져 계셨음을 뜻한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히 무리한 상징화예요. 저로서는 고증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데 중세 시대에 위를 덮는 판이 성모님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나왔고, 그 해석에 입각하여 그 이전까지는 없던 '판을 숨기는' 의례가 창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런 식으로 의례가 확장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 房家 2011/02/28 01:37 #

    주서라는 번역은 아마 어느 사전의 풀이를 따른 것일텐데, 지금은 출처가 생각나지 않네요. 그리 대단한 근거가 있는 번역은 아닙니다. 이런 언어의 경우 우리나라의 신앙 현실에서 어떤 말로 통용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땐 그런 말을 찾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전이 그런 현실을 반영해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는 많지요. 그래서 전례학자의 용례를 소개해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에 이 말을 사용할 때 큰 참고가 되겠습니다.

    성작 위를 덮는 판이라, 저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미세한 행위네요. 처음 들었는데 무척 흥미롭습니다. 성모에 관련된 부분은 중세를 거쳐서 대중적 신심이 공식적인 믿음으로 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고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리나 축일 등 대부분 그런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성모 신앙이 전례에요소로 삽입되는 과정 역시 정확한 시점을 집어내기는 쉽지 않아보이지만 대단히 흥미롭네요. 이번에도 가치 있는 단편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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