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3 20:16

일본과 기독교의 만남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타자의 인식 기독교세계

몇 주 전에 발표했던 글. 또랑또랑한 친구들 앞에서 했던 발표라서 얻은 게 많았던 자리이다. 이 글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다듬었던 것이다. 처음 글의 뼈대에서 수업시간에 제출한 페이퍼로, 그리고 발표용 원고인 이 글로 나름대로 진화를 겪었다. 이번 글에서 변한 것은, 우선 발표를 위해 본문 분량을 줄이느라 원래 본문에 있던 내용을 엄청난 양의 후주로 돌린 편법을 사용했다는 것. 후주의 양이 거의 본문의 양에 맞먹는다.
물론 내용상의 보강도 있다. 일본 내의 타자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분석한 토비(Roland Toby)의 글이 추가로 참고가 되었다. 이 글에는 포르투갈과의 교역 당시 형성된 일본 대중문화 내의 타자의 이미지의 역할을, 후에 조선 통신사 복장에서 유래한 도상들이 물려받게 된다는 분석이 들어있어 흥미로웠다. 다른 보강이라면 종교학 일반의 타자에 대한 논의와 연결시키고자 했던 부분이다. 조너선 스미스의 분석에 너무 기댄 바는 있지만, 일반화의 골격은 잡히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일반화 혹은 이론화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 점은 들어가는 글에 잘 드러난다. 사실 들어가는 글의 내용은 엉성하고, 그 엉성함의 이유는 솔직함에 있다. 무릇 논문의 서문은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개요와 범위를 지시해주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이 글이 어떠한 것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글의 표현으로는 ‘기대’)을 밝혔다. 일본의 사례가 어떠한 ‘만남의 모델’을 예시하였는가를 명시하지 못했으면서,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 이러한 서술에 대해 당시 토의에서 지적들이 있었다. 마땅한 지적이며, 그 부분만 더 진척이 된다면, 만만한 곳에 기고해서 마무리지어야 겠다.

일본과 기독교의 만남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타자의 인식



1549년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하비에르가 일본에 입국한 이래 한 세기 남짓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기간을 일본 “기독교의 세기”(1549-1622)라고 부른다. 이것은 동아시아와 서구 기독교의 본격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 글에서 의도하는 것은 일본에서 있었던 기독교의 만남의 사례를 통해 동아시아나 다른 비서구 세계에서 있었던 서구와의 만남, 더 나아가 종교사에 있었던 타자와의 만남과의 비교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예수회의 일본 선교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것에는 두 가지의 다소 이질적인 계기가 존재한다. 첫째는, 동아시아와 근대 기독교의 첫 만남이었다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만남이 이후의 중국이나 한국과 기독교의 만남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어떠한 만남의 모델을 예시하였는가를 알아보려는 기대이다. 둘째는, 보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 만남이 서구와 비서구 세계의 만남에 관련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최근의 이론적 논의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하는 기대이다. 글의 전반부(1, 2절)에서는 서양인과 일본인이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상하였는지를 살피고, 후반부(3절)에서는 예수회의 일본 선교 정책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의 쟁점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를 보도록 하겠다.


1. 서양 사람들이 본 일본 사람들

1.1. 하얀 동아시아 사람들
서양 문헌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치핑구”라는 이름이다. 폴로는 중국 원(元)나라에서 들은 것을 바탕으로 황금이 많은 엘도라도 같은 나라 치핑구를 신화적으로 서술하였으며, 그 곳 사람들이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잘생겼다”고 했다.1)
유럽인들이 실제로 일본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하여 아시아로 통하는 무역 항로를 개척하면서부터였다. 1512~1515년에 포르투갈의 무역 거점 말라카(Malacca, 지금의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상인 토메 피레스(Tomé Pires)는 처음으로 현실적인 지명 ‘일본’(Jampon)을 언급하였으며, 그 곳에서 만난 동아시아 상인들이 하얗다는 기록을 남겼다.2) 구체적으로 피레스는 류큐인(琉球人, Lequeos)들이 “하얀 사람들로, 좋은 옷을 입었고, 중국 사람들보다 잘 생겼고 단정하다. 그들은 중국 사람들보다 더 신뢰할만한 사람들이다.”라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레퀘오스(Lequeos)는 구오레스(Guores)라고 불린다.”라는 짤막한 언급을 해 놓았다.3) 피레스의 자료를 처음 소개했던 학자 박서(Charles R. Boxer)는 이 자료에서 언급된 ‘구오레스’를 유구 상선에 타고 있었던 일본인으로 보았고, 그에 따라 하얗다는 서술을 일본인에 소급했다.4)
‘구오레스’가 일본인이라는 박서의 추측에는 근거가 없으며, ‘구오레스’가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다. 내 생각에는, 이름이나 정황으로 볼 때 구오레스는 유구인들과 함께 활동한 고려인, 즉 한국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명칭의 지시대상이 어찌되었던, 우리가 피레스의 글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점은 그의 서술의 혼란스러움이다. “레퀘오스는 구오레스라고 불린다”는 언급은, 그가 동아시아인들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류큐인, 한국인, 또는 일본인들은 구분하기 쉽지 않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었고 ‘하얗다’고 묘사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얗다는 묘사가 일본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일반에 적용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의 한국인에 대한 묘사에서도 하얗다는 언급이 등장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5)
아시아인은 노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현재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유럽인들이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하얗다’라고 발언했다는 점은 다소 의외일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피부색을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규정하는 인종적 담론이 확립되기 이전 시기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세기 유럽에서 린네(Carolus Linnaeus)의 분류법이 제안된 이후, ‘호모 사피엔스’의 하위분류로 아메리카인(homo americanus), 유럽인(homo europaeus), 아프리카인(homo afer), 아시아인(homo asiaticus)이 확정되었고, 인종과 피부색이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결합되었다. 황인종(黃人種)으로서 동아시아인들을 만났던 18세기 이후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하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6)
그러나 16세기에만 해도 피부색에 대한 관심은 인종 담론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다. 1492년에 서인도 제도를 탐사한 콜럼버스의 일지를 보아도 원주민들이 그다지 검지 않다거나 하얗다는 표현들을 볼 수 있다.7) 이것은 유럽인들이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음을 반영하는 표현들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기록들은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그에 덧붙여 구체적인 정황을 고려할 때 이해될 수 있다. 기록을 남긴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은 인도의 고아(Goa)와 말레이반도의 말라카에 와서 주로 인도인들과 말레이인들과 교역하였다. 그런 와중에 만난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과 같은 동아시아 사람들은 남유럽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대적으로 하얀 사람들로 경험되었을 것이다. 피레스는 “중국 사람들은 우리만큼이나 하얗다”고 서술하였으며, 어느 대목에서는 중국 여자들은 스페인 여자처럼 생겼다고 관찰한다.8) 남유럽인들이 동아시아 인들의 피부색에서 친연성을 느꼈다는 점은, 조금 후대의 서술이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João Rodrigues)의 언급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일본 사람들에 대하여, “이 사람들은 하얗다. 북쪽 국가처럼 극단적으로 하얗지는 않고, 다만 적당히 하얗다.”고 묘사한다.9) ‘하얀 동아시아인’ 묘사는, 타지(他地)에서 ‘우리 같음’을 찾고자 했던 유럽인들의 노력에, 상대적으로 까만 유럽인과 상대적으로 하얀 아시아인의 만남이라는 현실적 상황이 겹쳐져서 형성되었다.

1.2. 하얀 일본인
‘하얀 동아시아’인 이미지는 유럽인과 일본인의 직접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일본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하얀 일본인’ 이미지로 구체화되었다. 일본인의 긍정적인 특성과 결합된 이 이미지는 예수회의 일본 선교 개시에서 정점에 이른다.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 세 명이 규슈 남쪽에 있는 섬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漂着)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인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시작된다.10) 일본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첫 기록은 1574년의 알바레스(Garcia de Escalante Alvares)의 것으로, 그는 일본인들이 “잘 생겼고, 하얗고, 수염을 길렀으며,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11) 그런데 알바레스의 기록은 일본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12) 일본인에 대한 정보와 인상에 대해서 알바레스와 하비에르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하얀 피부로 대변되는 긍정적인 일본인 묘사는, 일본에 대한 선교의 희망을 갖고 준비하고 있었던 하비에르가 애초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알바레스의 서술에 의해 상호 강화되었다. 이 지점에서 서양인의 초기 일본인 묘사의 역사는 기독교 초기 선교의 역사와 합류한다.
하비에르는 1547년에 말라카에서 일본인 야지로(Yajirō; Anjiro)와의 만남을 계기로 일본 선교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의 신앙과 열심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하비에르는 자기들처럼 얼굴이 희고 문명이 발달한 야지로의 나라 일본에 대한 동경(憧憬)을 품는다.13) 하비에르는 드디어 1549년 8월 15일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였고, 도착한 후 예수회에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선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교도 사람들도 일본인만큼 선천적인 선함을 지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 국가나 이교도 국가를 막론하고 내가 기억하는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그들은 절도(竊盜)를 혐오합니다.14)

일본에 도착한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 이러한 언급은 많은 부분 그가 갖고 있었던 이미지를 재확인하고 강화한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비에르의 관점은 동료 선교사들과 후임자들에게 유지되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로드리게스의 묘사가 그러하며, 후임자 발리나뇨(Alessandro Valignano) 역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본인들은 “판단력, 유순함, 기억력에 있어서 동양 민족뿐 아니라 서양 민족들 가운데서도 으뜸이다.”15)
‘하얀 일본인’ 담론은 문명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카브랄(Francisco de Cabral)의 경우처럼 일본인을 신뢰할 수 없는 이류 국민으로 멸시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긍정적인 담론을 공유하였고, 이것이 하비에르와 발리나뇨로 이어지는 예수회 정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 태도는 우리가 뒤에서 살피게 될 적응 정책의 기저를 형성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얀 피부에 대한 언급은 우리/그들의 구도에서 타자를 유럽인 ‘우리’의 자리에 가까이 놓으려는 시도였다. 일본인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고 문명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선교의 근거로서 작동하였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지역에서 이루어진 선교 담론과 비교해볼 때 큰 차이가 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벌거벗음’이었고, 의복의 부재는 종교를 포함한 다른 문화 요소들의 부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16)


2. 일본 사람들이 본 서양 사람들
서구인들의 일본 인식을 바탕으로 예수회의 일본 선교를 고찰하기에 앞서서, 일본인들의 자리에서 인식된 서양인이라는 타자의 이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본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일본 열도에 서양인이 출현하여 기독교를 전파한 사건은 큰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몽고의 침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본인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 타자를 본격적으로 대면한 것은 고대 왕조에서 일본의 정체성이 형성된 이래 처음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적인 타자를 매혹과 두려움으로 규정했던 루돌프 오토의 논의에서 잘 드러나듯이,17) 미지의 존재는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서양인에 대한 일본의 대중적 표상에서 이 양면적 인식을 볼 수 있다.

2.1. 매혹적인 타자: 물질의 근원
일본의 기독교 선교는 상품 교역과 함께 이루어졌다. 영주들은 기독교를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유치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반면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영주들의 옹호와 적극적인 지원 아래 활발하게 기독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오나 노부나가와의 첫 대면에서 별사탕과 양초를 선물한 장면은, 이러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8) 서양, 즉 기독교와의 만남은 새로운 물건들의 유입을 동반하는 것이었으며, 서양인이라는 타자는 신기한 물건이 나오는 근원으로 인식되었다.
그림 1) 남만 병풍 중에서 상품을 나르는 행렬의 모습(일부)
우리는 일본인의 대중적 상상력에서 기독교와 새로운 물물(物物)에 대한 상상력이 긴밀하게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남만(南蠻) 병풍(屛風)이라는 회화 장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남만 병풍은 서양인(남쪽 오랑캐)들과의 교역을 주제로 한 병풍 모양의 풍속화를 말한다. 이 그림에는 포르투갈 선박, 선상의 한가로운 남만인들, 짐을 내려 작은 배로 운반하거나 항구로 나르는 광경, 예수회 선교사들, 남만사(南蠻寺, なんばんじ)라고 불리는 교회당, 나가사키 항 등이 그려져 있다.19) 상선에서 나온 진귀한 물건들을 나르는 행렬은 이 그림의 중심적인 테마가 된다.(그림1 참조) 이 그림들은 기독교가 완전히 추방되지 않은 1600년대 초부터 그려졌지만, 기독교가 금지된 이후에도 복을 가져다주는 그림이라고 해서 상인의 집의 장식품으로 애용되어 많이 그려졌다. 선교사들은 물질적인 근원과 닿아있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매혹적인 타자로서 인식되었다.

2.2. 두려운 타자: 괴물
물질적 근원이 선교사들의 매력적인 측면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괴물로서 인식된 타자의 모습이 있었다. 에도 시대인 1639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리시탄 모노가타리>>(切支丹物語)에서 선교사와 일본인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고지 시대(1555-1588)에, 진무 시절 이후 108번째 천황 미카도 노나라노인(後奈良天皇, 1536-1557)이 통치하던 시절에, 남만(南蠻)의 무역선이 우리 해안에 왔다. 배에서 처음으로 이름붙이기 힘든 생물이 나왔다. 모습은 인간하고 좀 비슷하기도 했지만, 얼굴은 코가 긴 도깨비나 거대한 악귀 미코쉬 뉴도(みこしにゅうどう)에 더 가까웠다. 가까이 가서 조사하자 그것은 ‘바테렌’(バテレン)이라고 불리는 존재임이 밝혀졌다.20)

여기서 ‘바테렌’은 신부(神父)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파드레(Padre)의 일본 발음이다. 바테렌은 인간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도깨비에 더 가까운 존재로 묘사된다. 여기서 언급된 악귀 미코쉬 뉴도[入道]는 일본 민속에서 목이 길고 키가 몹시 큰 괴물을 일컫는다. 이어지는 바테렌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서는 그의 괴물로서의 특성이 나열된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코의 길이였다. 그것은 (표면에 혹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코에 소라 껍데기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눈은 안경만큼이나 컸고, 눈 안은 노랬다. 머리는 작았다. 손과 발 위에는 손톱과 발톱이 길게 나 있었다. 키는 7피트가 넘었고, 온통 까맸는데, 코만 붉은 색이었다. 이빨은 말 이빨보다 길었다. 머리카락은 쥐색이고, 이마 위로는 술잔 모양으로 면도한 자국이 보였다. 그가 말하는 것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올빼미가 우는 것 같았다. …… 이 존재가 가장 난폭한 도깨비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라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그의 이름은 우루간 바테렌(Urugan Bateren: 오란티노 신부[Padre Orantino Hnecchi-Soldo]를 가리킴.)이었다. 품속에는 기리시탄 종교를 퍼뜨릴 계획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먼저 일본 사람들의 지혜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남부 바바리로부터 각종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왔다.21)

그림 3) 영주에게 인사하는 바테렌
코의 크기를 중심으로 해서 신체적 특징들을 과장하는 묘사 기법들,22) 소통 불가능한 그들의 언어를 짐승의 것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이 괴물 이미지는 타자를 ‘그들’의 자리에 놓는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기리시탄 모노가타리>>에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삽화가 삽입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을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 괴물처럼 묘사된 바테렌의 모습을 그림2과 그림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괴물적 이미지에는 통제되지 않는 힘을 가진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23)

2.3. 남만(南蠻)이라는 기호
서양인의 물질적 매력과 괴물의 두려움은 공존하는 것이었다. 16-7세기에 일본인들이 서양인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남만인(南蠻人, なんばんじん)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남쪽 오랑캐’라는 뜻의 남만은, 중국인이 자신들을 기준으로 네 방위의 타자들을 가리키는 명칭들인,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의 하나이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이 명칭을 재설정하여, 일본의 남쪽인 동남아시아에서 바닷길로 오는 사람들을 남만이라고 불렀다. 16세기부터 남만은 동남아에서 바닷길로 일본에 온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가 된다. 그들을 남쪽 오랑캐라고 부른 데에는 분명 낯선 생김새의 괴물 이미지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멸적 용어인 남만은 이후 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앞서 ‘남만 병풍’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남만은 그들이 갖고 오는 진귀한 물건들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기리시탄’이라는 이국적인 정서와 매력이 담긴 단어로 변화하였다.24) 타자가 지닌 양가성(兩價性)에 의해서 남만에서 애초의 ‘야만인’이라는 기의(記意)는 탈각되었고, 남만은 이국성을 띤 고유명사로서 소통되는 기호가 되었다.25)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는 타자를 표상하는 유형 세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어떠한 신체적 특성이나 문화적 특성이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것을 갖고 타자를 환유적으로(metonymically) 표상하는 것이다. 둘째는 타자를 자신의 우주관의 주변부에 지형학적(topographically)으로 위치시켜 표상하는 것이다. 셋째는 타자를 언어적 능력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지적인 능력의 차원에서 표상하는 것이다.26)
우리가 살펴본 일본인의 서구 타자 표상 방식들에는 이 세 모델이 모두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서양인의 긴 코를 과장하여 희화화하거나 키가 크다는 특성을 잡아 미코쉬 뉴도라고 명명한 것은 타자의 환유적 표상에 해당한다.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올빼미가 우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이방인들을 바바리안(barbarian)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측면에서의 타자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서구인 타자화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두 번째 지형학적인 모델이다. 일본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서구인들을 남쪽 주변부에 놓고 ‘남쪽에서 온 야만인’[南蠻]이라고 불렀다. 다른 예를 들자면,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 사람들로 부터 처음 들었던 말은 “천축국(天竺國) 사람”(てんじくじん)이었다.27) 일본 사람들의 세계관 내에서 먼 신화적인 서쪽 나라 인도에 낯선 서양 사람들을 배치한 것이다. 야만적인 남쪽 어딘가가 되었든 신화적인 서쪽 나라가 되었든, 지형학적 표상에서 타자는 일본인들의 세계관 내의 변방에 귀속된다.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을 자기들이 알고 있었던 세계 바깥에서 온 사람들로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타자와의 만남이 기존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어 새로운 세계관이나 우주론의 형성에 이르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못하고 기존의 설명 체계 내에 종속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있었던 타자와의 만남의 양상에서 그 두 경우를 볼 수 있다. 몽골의 유럽 침입은 유럽 사람들 입장에서 세계 밖의 타자가 폭력적으로 들어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만남은 유럽인들의 세계 인식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대신에 유럽인들은 몽골인들을 성서 전승에 존재하는 부족 곡과 마곡28)으로 명명함으로써 기존의 세계관 내에 위치시켰다. 반면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라는 타자를 만났을 때, 아메리카의 존재는 유럽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세계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대륙에는 노아의 아들 셈, 야벳, 함의 자손들이 살고 있었다는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계 인식을 구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9)
16세기 서양과의 만남은 일본인의 세계관에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기 보다는 남만이라는 기존의 언어로 설명되었다. 물론 ‘남만’에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고, 계속적인 서양과의 관계를 통해 지리적 지식의 확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19세기 미국과의 통상을 계기로 일어났던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예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예비과정이지만, 16세기 당대에 대중적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16세기의 만남을 계기로 일본에는 ‘남만 양식’이라는 타자의 표현 방식이 생겨났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남만 병풍을 비롯한 남만 회화에, 그리고 거리 축제의 퍼레이드 의상과 후에는 행상들의 광대 복장에까지 응용된다. 기독교와의 관계가 단절된 17세기 이후 남만 양식이 자유롭게 사용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일본 대중문화의 타자 표현 방식은 다른 곳에서 재료를 찾는데, 그것은 조선과 오키나와 통신사의 행렬에서였다. 특히 긴 모자, 단추 많은 재킷, 긴 부츠, 판탈롱, 구렛나룻 등 남만인에서 따온 이국성(異國性)을 표현하는 아이템들이 갓, 수염, 도포, 신발 등 조선인들에게서 찾아낸 특성들에 의해 대체되었다.30) 타자성의 표현이라는 영역에서 조선인이 남만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16세기 일본에 출현한 서양이라는 존재는, 적어도 당대에는,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기 보다는 일본인의 기존 세계관 내에 부여된 자리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기독교사에 관련해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16세기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되어서 빠른 시간 내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놀라운 일인데, 그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던 기독교가 일본 문화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거의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자리에서 그러한 의문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처음 만남에서 서양인들이라는 존재가 일본인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어 새로운 인식의 언어를 생성하기 보다는, 기존 세계관의 언어로 소화되었다는 사실이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예수회의 일본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타자 인식
일본의 기독교 전래 과정을 다루는 것은 적은 지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항해 시대 서양 세력 진출의 역사, 선교사의 맥락, 그리고 일본 내부의 정치적 변화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다루어질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타자와의 관계 설정이라는 우리 관심에 맞추어 단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정리할 때, 선교 과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만남의 처음 단계에서 서로간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만남이 진행됨에 따라 유사를 기반으로 차이를 극명하게 인식하고, 다시 만남이 성숙함에 따라 유사와 차이 양자를 지양하여 양자 간의 전략적 선택이 가능한 지점에 도달하는, 변증법적인 과정이다.

3.1. 불교와의 유사성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일본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처음에 “천축국 사람들”로 불렸다. 이는 일본인들이 기독교를 불교 비슷한 것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선교사 하비에르는 ‘불교와의 유사성’을 거부하지 않고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일본 승려들이 입는 비단옷을 입고, 불교 용어를 사용하여 선교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신의 명칭이다. 그가 처음에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채택한 용어는 다이니치(大日, だい-にち)였다. 다이니치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일본식 표기이지만, 일본의 종교사에서는 불교를 넘어서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일본 중세에 일어난 신불습합(神佛習合)을 통해서, 다이니치는 일본인들에게 신도의 최고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과 동일시되고 있었다. 초기에 하비에르를 도와 번역 작업을 했던 일본인 야지로가 다이니치를 하느님의 번역어로 제안했던 것에는, 당시 일본 종교 체계에서 최고신 다이니치를 기독교 최고신과 등치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에도 하비에르는 천국의 번역으로 조도(淨土, じょうど)를, 사제의 번역으로 소(僧, そう)를, 신학의 번역으로 부포(佛法, ぶっ-ぽう)를 사용했는데,31) 이것은 새로운 용어를 고안하는 부담을 피하고 이미 존재하는 토착어를 사용한다는 원칙에 따른 번역이었다.32)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이 ‘다이니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일본인들은 그것을 불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였다. 하비에르가 야마구치를 방문하여 진언종 승려들에게 하느님은 “힘과 지혜, 선함 등 모든 요소로부터 떨어져 있는 순수한 본질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승려들은 “이 신부가 이야기하는 법의 내용은 우리들의 법과 동일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고 한다.33) 하비에르는 나중에 자신의 용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신 명칭을 다이니치로부터 데우스(Deus, デウス)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바꾸게 된다.34) 그리고 수사 페르난데스에게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다이니치를 숭배하지 말 것’, ‘다이니치는 악마의 창작’이라고 말하라고 명령한다.35)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유사성은 선교의 출발점을 제공해주지만, 뒤이어 차이의 인식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일본의 예수회의 경우 불교와 자신의 차별성이 시급한 사안이 되었다.

3.2. 차이의 인식: 인접한 타자로서의 불교
하비에르 이후 세대의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비교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의 <일구(日歐) 문화비교론> 부분이다.36) 이 글은 “우리는 ~하고, 일본은 ~한다”는, 우리와 그들의 비교를 통하여 차이를 서술한다. 프로이스는 기독교의 수도사(혹은 사제)와 일본 불교의 승려, 혹은 기독교의 의례, 성물, 건축과 일본 불교의 것들 사이의 대칭을 전제로 해서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세밀하게 관찰한다. 몇 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3. 우리 수도사들은 결혼하면 종교의 교의를 저버린 사람이 된다. 승려들은 신앙생활에 싫증이 나면 결혼을 하든지, 병사가 된다.
18. 우리 수도사들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깎는다. 승려들은 4일마다 머리와 수염을 깎는다.
19. 우리 수도사들은 카페로나 바레테를 쓴다. 승려들은 대부분 모자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 추울 때 복장의 하나로 승려모 또는 면 모자를 쓴다.
20. 우리들 사이에서 수도사는 예절과 좋은 규범을 높이 평가한다. 승려들은 항상 다리를 드러내놓고 걸으며, 여름에는 거의 전신이 비치는 얇은 홑옷을 입는다. 누구도 이를 부끄럽다거나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37)

‘비슷하면서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유럽에서의 비슷하면서 다른 적대자인 개신교의 모습이 일본 불교 종파들에 투영되면서 비판의 강도는 극에 달한다. 다음 인용문에서 발리나뇨는 개신교의 모습을 일본 불교 안에서 읽어낸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그들은 성불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나무 아미다 붓”이라고 말하며 부처 이름을 외기만 하면, 혹은 “메오”(Meo:묘호렝게쿄)라는 이름을 말하기만 하더라도 이들 부처의 공덕으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깨끗해진다고 한다. 다른 참회를 행하거나 다른 성사에 참여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참회와 성사가 이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불교도와 루터 모두의 아버지인 악마가 루터에게 가르친 교리를, 그들은 정확하게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38)

여기서 언급되는 ‘그들’은 정토종, 일련종 등 일본에서 생성된 교단들이다. 구원에 있어서 절차의 간소화를 주장한 이들 교단들에서, 발리나뇨는 성사의 효력을 부정하고 의례를 간소화하는 개신교의 불온한 기운을 감지한다.
종교사에서 항상 가장 격렬한 비난은 “인접한 타자”(the proximate other)에 가해졌다. 인접한 타자는 ‘우리’의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서 기록자들은 예수를 처형한 로마 정부를 비난하는 대신 같은 유대인들 중 의견이 달랐던 집단에 책임을 지우는 데 전력을 쏟았다. 바울의 경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 로마 종교 신자들에게는 적대적인 글을 쓰지 않았으나, 자기 가르침에 반한다고 자기가 주장한 동료 기독교인들에게는 항상 적대적인 글을 썼다. 13세기 몽골에 갔던 선교사 루브룩의 윌리엄(William of Rubruck)은 그들과 교전 중인 무서운 타르타르인들과 유럽 기독교 문화 사이에서 여러 긍정적인 유사점들을 발견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 곳에 남아있던 경교(景敎) 기독교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로 기록하였다.39) 우리는 이 끝없는 목록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의 ‘개신’ 불교에서 느꼈던 불온함을 추가할 수 있겠다. 기독교사에서 교회 내부에서 대립하는 세력을 지칭하기 위하여 발달되었고,40) 당대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논쟁에서 사용되었던 악마 개념이, 일본 불교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3.3. 적응 정책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다름을 인식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유사와 차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바로 이 점에서 적응 정책(the Accommodative Method)이라고 불리는 예수회 선교 정책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우리와 ~한 점에서 다르다”라는 차이의 인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가 실제로 일본에서 실천한 것은 ‘우리’를 ‘그들’ 안에 위치시키는 노력이었다. 기독교 선교사에서 항상 문제가 되었던 ‘문명과 복음의 동일화’라는 쟁점41)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이해한 문화를 번역 가능한 기호 체계로 사용할 수 있었다.

3.3.1. 복장과 건축
선교사의 복장 문제가 좋은 사례이다. 앞서 보았던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다음과 같이 복장에 있어서 차이의 인식을 진술한다.

8. 우리들 사이에서 수도사는 세간을 얕보기 때문에 비단옷을 몸에 걸치지 않는다. 승려들은 가능한 한 세간에 대하여 교만과 허식에서 비단옷을 걸치고 걸어 다닌다.42)

그러나 선교 책임자였던 발리나뇨는 그 ‘다름’이 일본 문화의 구조적 맥락 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본인의 의상이 해당 문화권의 상징체계 내에서 어떠한 언어로 기능하는지를 분석한다.

우리 유럽인들이 흰색 옷을 기쁨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하고 또 축제에 흰 옷을 입는다면, 일본인들에게 흰색 옷은 장례식이나 슬픔을 나타내야 할 곳에서 입는 옷의 색이다. 그들은 또 검은 색이나 진한 자주색, 그리고 회색 옷을 좋아한다.43)


그림 4) 남만 병풍에 그려진 남반지[南蠻寺]
실제 예수회 정책에서 선교사들이 일본 승려와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고 활동했던 것은, 이러한 구조적 이해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44)
건축에서도 마찬가지 쟁점을 볼 수 있다. 교회와 일본 불교 사원의 건축과 공간 배치의 차이점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5) 예수회는 서양 건축을 고집하지 않고 ‘남쪽 야만인들의 사원’, 남반지[南蠻寺]에서 활동하였다. 불교 사원을 사용하거나 불교식으로 건축된 건물인 남반지에서, 예수회는 유럽식이 아닌 새로운 공간 질서를 구축하였다.(남만 병풍에 그려져 있는 남반지를 볼 것. 그림 4.) 불교식으로 따로 떨어진 장방형의 본당을 두었고, 다만 절에서라면 탑이 들어서는 본당 앞자리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이러한 작업은 기존의 성스러운 공간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기독교적인 의미를 새로 창출해낸 지적인 브리콜라주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46)

3.3.2. 오본 축제
어떠한 행위를 종교 행위로 분류하여 기독교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는지(이 경우 미신(迷信)이라고 지칭된다), 아니면 풍속으로 분류하여 충돌을 피할 것인지는 기독교 선교사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쟁점이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에서는 원주민들의 춤이 종교 의례인지 전통인지를 놓고 문제가 되었는데, 예수회에서는 춤을 전통으로 인정해서 허용한 반면에 나중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춤을 미신으로 여겨 금지시켰다. 춤을 전통으로 보느냐 종교 행위로 보느냐는 단순히 분류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춤이 전통으로 인정받아 계속 유지될 때, 그것은 자연스레 기독교 체계의 한 부분으로 들어와서 의례의 한 부분으로 결합한다. 적응은 결합을 통한 토착화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예수회 적응 정책의 실천 과정에서도 종교(미신, 이단)/문화(전통, 풍습)의 분류가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 전통의 설날은 전통으로 존중되어 설날 때에 맞추어 미사가 행해졌지만, 부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는 행위는 다른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미신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다.47) 이러한 점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오본 축제에서 춤추는 행위에 대한 것이 있었다. 한국의 우란분재(盂蘭盆齋)에 해당하는 일본의 오본(お盆) 축제는 8월 15일 경 죽은 조상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념하여 길에 불을 밝히고 춤추며 경축하는 행사이다.48) 죽은 조상들이 돌아온다는 관념은 기독교의 영혼관과 충돌할 수 있는 문제였다.49)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면서 발리나뇨는 예수회 본부에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질문을 보낸다.

미신이 아니라 사람들과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우상의 앞을 지나가도 숭배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할 염려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또 이것은 주인이 기독교를 비방하기 위해서 명령한 것이 아니며 이 명령을 거부하면 생명에 중대한 위협이 미친다고 가정한다면, 기독교인이 마쓰리(まつり)의 춤에 참가해도 좋은가?50)

이 질문에 함축된 것은 발리나뇨의 인류학적인 관찰이다. 그는 이를 통해 행위가 표면적으로 지시하는 것 말고도, 사회 구조 내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를 탐구한다. 그 결과 행위의 외면적 의미와는 다른 층위에서 사회공동체적인 의미가 존재함을 논구하고, 이를 통해 예수회 본부의 승인을 얻어낸다. 발리나뇨의 이러한 접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문제는 일본의 오본 축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조상 숭배를 갖고 있는 동아시아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중국 선교에서 있었던 전례(典禮) 논쟁과 한국에서 윤지충이 조상 신위(神位)를 불태워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 때의 쟁점들은 모두 오본 축제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에서 있었던 가톨릭과 동아시아의 첫 만남에서, 향후 동아시아 천주교사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가 이미 제기되었고 발리나뇨에 의해서 진지한 답변이 제시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3.3.3. 둘둘만 종이에 그려진 성모
당시 선교 현장에서의 필요성 때문에 일본의 예수회는 일본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술 교육을 실시하였다.51) 다른 분야와는 달리 도상에 대해서는 서양식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일본 천주교인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당시 가톨릭 예술품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표현 양식들이 희미하게 반영되기도 하며, 때로는 형식상 불가피하게 일본 양식과 결합할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제작된 제단 그림 중에서는 일본 모모야마 시기에 유행한 옻칠한 함에 성화를 집어넣어 만든 제단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그림 5) <백설의 성모 The Madonna of the Snow>
기독교의 성화 개념은 불교에서 사용되었던 도상과는 다른 것이었고, 선교사들은 이 차이점을 잘 지각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 프로이스의 ‘차이’에 관한 기록에서도 성화에 관한 지적들이 여럿 있다.52) 그 중에서도 성화가 그려지는 재질에 대한 언급이 있다.

28. 우리들은 성상을 판자에 그린다. 그들의 것은 둘둘만 종이에 그려져 있다.53)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일본인의 성화는 위의 차이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옆의 그림(그림 5)은 일본 나가사키의 ‘숨은 기독교인’(かくれ-キリシタン)의 집에 기독교 탄압을 피해 몇 세기 동안 숨겨져 왔다가 1960년대에야 발견된 작품 <백설의 성모>라는 작품이다. 일본 종이 위에 수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표구되어 있다. 재질뿐만 아니라 여성의 표현 양식에 있어서도 일본적 미가 잘 배어있는 이 작품은 일본의 예수회가 남긴 그림 중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54)
예수회 선교사가 아니라 일본인 신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회 선교 정책 사례들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앞서의 것들이 서구인에 의해 시도된 우리/그들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려는 시도였다면, 이 사례는 일본인 편에서 이루어진 시도였다.


4. 결론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서양인과 일본인의 만남에서 형성된 상호 오해와 이해의 과정에서 드러난 인식의 논리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인식의 논리는 당사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6세기에 아시아 무역에 나섰던 유럽 상인들은 낯선 아시아에서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자 하였다. 동아시아인들의 ‘하얀 피부’는 문화적으로는 소통가능성을, 상업적으로는 교역가능성을 지시해줄 수 있는 긍정적인 표식이었다. 일본 선교를 개시하고자 했던 하비에르의 입장에서 ‘하얀 일본인’은 그들이 ‘우리’와 비슷하게 문명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선교의 근거를 제공하는 논리였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 사회 내에서 우리/그들의 이분법을 넘어서 일본 문화 내에 자리잡고자 하였다. 일본 안의 소수자의 존재로, 게다가 지배자의 자리가 아니라 손님의 자리에 있었던 일본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자리는 아메리카에서 활동한 선교사들과는 달랐다. 선교사들이 원주민에 행사할 권력을 가졌던 지역에서는 원주민 ‘그들’을 유럽인 ‘우리’로 만드는 문명화 선교가 진행되었고, 그 때 우리/그들의 이분법은 손상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우리/그들의 차이의 인식을 넘어서 ‘우리’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응 정책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한편 일본인의 입장에서 서양인은 오랫동안 타자로 남아있었다. 그들의 자리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물질적 부의 근원으로 주술적 힘을 지닌 선교사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통제되지 않은 미지의 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은 선교사에서 괴물 이미지를 떠올렸다. 19세기에 서구 열강과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서양인들은 세계의 변방에 위치한 타자였고, 이국적임을 표상하는 기호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그들을 넘어서는 상호성의 모색은, 그것인 아무리 상황에 의해 요구되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도로 남는다. 적응 정책에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사와 차이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가능케 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유사와 차이의 논법은 여느 선교지에서도 드러나는 만남의 과정이지만,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도달한 적응의 단계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이해의 수준은 일본 풍습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라든지 일본 성화 예술 등에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종교문화에서 타자를 만나는 일은 늘상 있는 일이기에, 예수회가 보여준 이해의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1) 마르코 폴로, 김호동 역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0). 마르코 폴로는 1271부터 1295년까지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폴로는 일본에 실제로 가 본적이 없으며, 이 책의 묘사는 그가 머물렀던 원(元)나라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원나라가 1271년과 1274년 일본 원정에 실패한 후에 기술된 <<동방견문록>>에는 실패한 원정지(遠征地) 일본에 대한 원나라 사람들의 이상적인 묘사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치핑구는 금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곳 군주는 “순금으로 뒤덮인 멋진 궁전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집이나 교회를 납판으로 덮듯이 금으로 씌워놓았다”(416)고 이야기된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 앞부분에서, 폴로는 다음과 같이 일본을 묘사한다.

치핑구는 육지에서 동쪽으로 해상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매우 큰 섬이고, 주민들은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잘생겼다. 우상숭배자들이고, 다른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립해 있다. 또한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그곳에서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금이 나기 때문에 금이 대단히 많다.(416)

일본에 대한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한 내용이 아니라 할지라도, 위의 내용은 이후 향후 수백 년 동안 서구에서 일본에 대한 유일한 묘사로서 일본에 대한 서구인의 상상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후에 콜럼버스가 처음 산 살바도르 섬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는 황금의 나라 치핑구 섬을 찾아 길을 재촉하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종훈 옮김, <<콜럼버스 항해록>> [서해문집, 2004], 47.)


2) Tomé Pires, The Suma Oriental of Tomé Pires: An Account of the East, From the Red Sea to Japan (London: The Hakluyt society, 1944), 129. 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는 일본에 대한 언급은 소략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일본 섬(Ilha de Jampon)은 유구(Lequjos) 섬보다 크다. 왕은 더 권력이 세고 강대하지만 무역을 하지 않으며, 백성들도 무역에 종사하지 않는다. 그는 이교도 왕으로, 중국 왕의 봉신(封神, vassal)이다. 그들은 중국과 자주 무역하지 않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범선(junk)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항해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구인들은 7-8일 걸려 일본에 가서 상품을 팔고 금과 구리와 교환한다. 유구인들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그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유구인들은 일본 사람들과 의류, 그물, 그리고 다른 상품들을 교역한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본격적인 묘사라기보다는 말라카에서 만난 중국 상인들, 그리고 유구 상인들을 통해 들은 일본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루고 있는 내용도 일본 자체에 관한 것보다는 중개 무역의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일본에 대한 정보이다. 피레스의 책에서 위의 일본 묘사는, 유구에 대해서 몇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설명한 이후에 간단하게 따라붙는 내용이다. 폴로의 치핑구가 원나라에 의해 매개된 일본이었다면, 피레스의 일본은 유구에 의해 매개된 일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Tomé Pires, The Suma Oriental, 130, 128.


4) Delmer M. Brown, "Review: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Journal of American Oriental Society 72-4 (1952), 183. 피레스 저술을 소개한 박서(Charles R. Boxer)의 책은 이 분야의 고전 <<일본의 기독교 세기>>(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인데, 나는 아직 이 책을 구해 보지 못했다.


5) 16세기 말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 오만 & 장원철 옮김,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187.)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이야기에 따르면)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 종교 의식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Xaca)와 아미타불(Amida)을 숭배한다. 몇몇 큰 강이 있고, 그 가운데 하나는 하구의 넓이가 10리나 된다. 또한 조선과 중국이 인접해 있는 변경에는 통과하기가 매우 어려운 넓은 사막이 있다고 한다.

한편 위 인용문에서 한국의 종교에 대해 서술한 것은 간략하기는 하지만 한국 종교에 대한 서구인들의 언급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은 임진왜란 이후 작성된 <1592년 일본 예수회 연례보고서>나 1601년 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án)이 저술한 <<선교사들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박철, <<(예수회신부) 세스뻬데스: 한국 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출판부, 1987], 229-30.) 동일한 자료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6) Rotem Kowner, "Skin as a Metaphor: Early European Racial Views on Japan, 1548-1853," Ethnohistory 51-4 (2004), 759-766.


7) “피부도 그다지 검지 않아서 카나리 제도 사람들의 피부색과 같았다.”(콜럼버스, <<콜럼버스 항해록>>, 44) “이곳의 원주민들은 피부색이 훨씬 하얀데, 마치 에스파냐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살결이 흰 젊은 여자 두 명을 보았다고 했다.”(콜럼버스, <<콜럼버스 항해록>>, 142) 등. 다음을 참고할 것. Tzvetan Todorov, Richard Howard (tr.), The Conquest of America: The Question of the Other (New York: Harper Perennial, 1984), 35.


8) Tomé Pires, The Suma Oriental, 116, 117.


9) Rotem Kowner, "Skin as a Metaphor," 754.


10) 후에 인도에 있던 포르투갈 관리 쿠토(Diogo do Couto, 1542-1616)가 그 이야기를 듣고서 그 만남의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육지에서 작은 배들이 맞이하러 나왔다. 배에 탄 사람들은 중국 사람보다 하얗고, 작은 눈과 짧은 수염을 가졌다.” C. R. 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25. (Rotem Kowner, "Skin as a Metaphor," 753에서 재인용.)


11) Rotem Kowner, "Skin as a Metaphor," 753. 또한 일본어가 독일어와 유사하다는 특이한 관찰도 남겼다.

12) Olof G. Lidin, Tanegashima: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 (Copenhagen: NIAS Press, 2002), 29.


13) 김상근, <<동서 문화의 교유와 예수회 선교역사>>(한들출판사, 2006), 76.


14) Francis Xavier, "가고시마, 1549년 11월 11일, 고아의 예수회에 보낸 서한," Henry James Coleridge (tr. & ed.), The Life and Letters of St. Francis Xavier (4th ed., London: Burns and Oates, 1912).


15) Rotem Kowner, "Skin as a Metaphor," 755.


16) Tzvetan Todorov, The Conquest of America, 35.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이러한 식의 언급의 예를 하나 든다면, 알곤킨(Algonkin) 족에 대한 예수회 수사 비어드(Pierre Biard)의 언급을 들 수 있겠다.

이 야만인들은 어떤 확실한 종교, 왕권이나 정부, 학문이나 기술, 상업이나 사회생활도 갖고 있지 않다. 그 결과 그들은 본 적도, 심지어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것들에 대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하느님을 명상하는 것, 숭고한 것들을 아는 것, 그리고 영혼의 고귀한 영역을 완벽케 함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기쁨을 전혀 누리지 않는다. (Christopher Vecsey, The Paths of Kateri's Ki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0], 11.)

이러한 식의 종교 부재에 대한 언급들은 다음 글에 조야하게 정리되어 있다. 방원일, <비서구세계 종교문화의 만남과 종교 개념에 대한 최근 논의들>, <<종교문화비평>> 8 (2005년), 143-147.


17) 루돌프 오토, 길희성 옮김, <<성스러움의 의미>> (분도출판사, 1987).


18) 정하미,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사>> (살림, 2005), 10. 정하미는 선교사들을 통한 새로운 물건들의 수용 통로를 “별사탕 로드”라고 명명한다.


19) 강덕희, <<日本의 西洋畵法 受容의 발자취>> (일지사, 2004), 36.


20) 익명의 저자, George Elison (tr.), <<기리시탄 모노가타리>>(切支丹物語, キリシタン ものがたり) in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The Image of Christianity in Early Modern Japa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321. 이 책은 에도 시대에 저자거리에서 유행하던 대중적인 소책자로,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21) <<기리시탄 모노가타리>>, 321.


22) 이 묘사 중에서 “손과 발 위에는 손톱과 발톱이 길게 나 있었다”는 특성은 이후에 일본 도상에서 한국이라는 다른 타자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Ronald P. Toby, "The "Indianness" of Iberia and Changing Japanese Iconographies of Other," in Stuart B. Schwartz (ed.), Implicit Understandings: Observing, Reporting, and Reflecting on the Encounters between Europeans and Other Peoples in the Early Modern Er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327, figure 11.2를 볼 것.


23) <<기리시탄 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괴물 이미지에 대해서는 정치적 맥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선교사들이 물질적 힘의 이미지로 인식되었을 때는 선교사를 통한 포르투갈 무역을 환영한 일본 영주들이라는 정치적 맥락이 존재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기리시탄 모노가타리>>가 유행하던 시절은 에도 시대로, 이미 기독교에 대한 탄압의 결과 기독교 세력이 제거되었던 시기이다. <<기리시탄 모노가타리>>가 저술된 1639년은 시마바라의 난(1638년)이 진압된 직후로, 사회적으로 반기독교 담론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왜 일본의 전국시대에서 막부시대로 넘어가면서 기독교에 호의적이던 정치적 환경이 적대적으로 변하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내린 이후 1597년에 급작스럽게 기독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1598년 나가사키 순교를 일으키게 된 경과 중 하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1596년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 호가 표착하였고, 선원 중 하나가 기독교가 스페인의 세계정복을 위한 선봉 역할을 한다고 떠벌려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린 사건이다. 이 경과를 히데요시 성격의 변덕스러움 탓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히데요시는 분명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기독교를 관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오다 노부나가가 불교를 견제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이용했던 것도 분명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 펠리페 호 사건이 히데요시에게 깨우쳐 준 것은 기독교는 분명 외부의 힘에 근거를 둔 것이고 일본의 통치자가 자신의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전국 시대에는 지방의 영주들의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외부의 힘으로서 기독교가 유익하게 작용하였다면, 통일된 일본의 정치적 맥락에서 기독교는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타자의 힘’이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정치적 감각에 의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국가 내에 통제되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기독교 탄압에 깔려 있는 가장 중요한 논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리시탄 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반기독교적인 담론들, 그리고 선교사에 대한 괴물 묘사는 이러한 통치자의 이데올로기가 철저히 반영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당시 대중들의 담론으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24) 정하미,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사>>, 22.


25) 당대의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남만’(南蠻)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유재란 당시에 있었던 다음 에피소드는 조선인들이 남만(일본어 발음으로는 ‘남반’)을 전통적인(중국 중심의) 용법으로 이해하려다 실패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선조실록>>의 내용으로 비변사 이항복이 한 이야기이다.

바로 지금 신(臣) 이항복이 호 도사(胡都司)를 찾아 보았더니, 도사가 즉시 하인들을 물리치고 은밀히 글로 써서 묻기를 “청정(淸正)이 돌아가며 왜적이 남반(南班)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지난번에 과연 원수(元帥)의 하인 한 사람이 원수의 장계를 가지고 진중(陣中)에서 올라왔는데 이런 얘기를 꺼냈으나 애당초 기장(機張) 등지의 촌 백성들에게서 나온 말로 그 지역에서 풍문으로 전해진 말이니, 확실한 것은 알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이 말은 절대 비밀에 붙이라. 소위 남반이란 곳은 어디에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단지 남만(南蠻)과 남번(南番) 등의 말이 보일 뿐, 남반국(南班國)이란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왜중(倭中)에서 자기네들끼리 하는 말로는 서남쪽으로 일본과 접해 있는데, 수로(水路)로 한 달 정도의 거리라 한다. 그러나 남반(南班)이라 하지 않고, 늘 남반(南盤)으로 쓰고 있었는데, 혹 반(盤)과 만(蠻)의 음(音)이 서로 비슷하여 잘못 남만(南蠻)을 남반(南盤)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는 반드시 남번(南番)일 것이다. 상국(上國)의 광동(廣東)·복건(福建) 지방과 거리가 매우 가까운 곳이니, 관백(關白)이 군사를 나누어 상국을 침범하려는 것이다.” 하기에, 글로 써서 답하기를, “내가 양산(梁山)에 머무를 때에 포로로 잡힌 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일찍이 정성(政成)을 수행하여 남반(南盤)의 상선(商船)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 이르러 직접 그들의 배를 보았는데, 배 한 척에 돛 다섯 개를 달았고 붉고 흰 모전(毛氈)으로 휘장을 둘렀으며, 천여 명을 실을 수 있어 비할 수 없이 컸다. 그들 배가 나오는데 마치 섬과 같아 보였다. 호초(胡椒)·단목(丹木)·침향(沈香)·필단(匹段)이며 온갖 보화가 모두 그 나라에서 산출된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88권, 30년(1597년) 5월 11일.)

반세기가 지나 효종 11년(1653년)에 하멜이 표류할 때에는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朴燕)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통용되는 고유명사적인 쓰임새가 조선에서도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효종실록>> 11권, 4년(1653년) 8월 6일.)


26) Jonathan Z. Smith, "Differential Equations: On Constructing the Other," Relating Religion: Essays in the Study of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4), 231-241.


27) Ronald P. Toby, "The "Indianness" of Iberia and Changing Japanese Iconographies of Other," 327-340.


28) 마곡이라는 부족 명은 <창세기> 10장에 나오고, <에스겔서> 38-39장에 ‘마곡 땅의 곡’이라는 이름의 적대적 세력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곡과 마곡 전승은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 사탄과 결합된다.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요한계시록> 20:7-9)


29) Jonathan Z. Smith, "Close Encounters of Diverse Kinds," Relating Religion: Essays in the Study of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4), 309-314.


30) Ronald P. Toby, "The "Indianness" of Iberia and Changing Japanese Iconographies of Other," 330-350.


31) 김상근, <<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79.


32)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33.


33)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33-34.


34) 일본에 기독교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신 명칭 번역의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는 동아시아 삼국에 신 명칭 번역 과정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일본의 경우 기독교 "God"에 상응하는 개념의 부재로 시행착오를 겪은 것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다. 중국의 경우에는 상제(上帝)라는 원시 유교 개념이 있어서 기독교 신 개념을 소개하는 데 활용되었고 번역어의 하나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天主)라는 새로운 개념을 고안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로스(John Ross)는 기독교 신 개념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인들은 지고신(the Supreme Being)을 일컫는 고유한 이름과 한문에서 빌려온 이름을 갖고 있다. 전자는 ‘하늘’에서 나온 ‘하느님’(Hannonim)이고 후자는 ‘샹뎨’(Shangde)이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뚜렷이 구분되고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번역이나 설교에 있어서 오래 전에 이 주제에 대해 중국 선교사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꼴사나운 말다툼과 같은 걱정은 없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명칭을 도입했지만 말이다. ‘하느님’이란 용어에 담긴 관념은,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전능자요 무소부재하며 보이지 않는 존재인 ‘천노야(天老爺, Tien laoye)’ 관념과 매우 흡사하다. (John Ross,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and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 (London: Elliot Stock, 1891[1879]), 355.)

한국인들에게 고유의 ‘하느님’ 신앙이 존재했기 때문에 번역의 어려움이 없었다는 로스의 주장은 현재 기독교계나 학계에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통념에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격신적인 하늘신 관념이 한국에만 독특하게 존재했다는 점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다. 한국의 하늘 관념은 중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천주교 전파이후 19세기에 한국에서 우리말 ‘하느님’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35)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오해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1562년에 알메이다 선교사가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들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 디오스(Dios=Deus)는 다이니치(大日)와 같은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메스트레 프란체스코 신부는 다이니치가 하느님이고 우리는 그 분을 섬겨야 한다고 설교하셨거든요.”


36) 프로이스는 1583년 가을에 발리나뇨의 명을 받아 <<일본사>> 저술에 착수하였다. 1584년에 <일본 총론(總論)> 부분을 나가사키에서 탈고하고, 1584년 6월 무렵에 <일구(日歐) 문화비교론> 부분을 집필하였다. 1585년 9월에 1549년-1578년까지의 편년사 서술을 통해 초고를 대략 완성하게 된다. 발리나뇨는 이 원고를 읽어보고는 “너무나도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고, 과장 벽이 있으며, 상당히 경솔하고 게다가 소심하고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어 있어 중용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평가하고, 출판을 보류시키는 한편 일본에 내용을 누설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이 초고는 18세기에 빛을 볼 때까지 마카오 예수회 문서관에 보관된다. 2500쪽에 달하는 이 원고는 원어인 포르투갈 어로도 전체가 활자화되지 않은 형편이다. 1926년에 독일어 번역본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1932년에 일어 중역본이 나왔다. 1977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어 번역판 12권이 완간되었다.(루이스 프로이스, 오만/장원철 옮김,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10-21.) 이 글에서는 해당 부분에 일어본에 대한 손미경 씨의 개인적인 번역을 사용하였다.


37) 루이스 프로이스, 손미경 옮김, <<일본사>>, “제4장 승려 및 그 풍습에 관한 것”


38) Valignano, Historia Indica (Rome: Institutum Historicum S.I., 1944), 160-61.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43에서 재인용).


39) Jonathan Smith, “Differential Equations,” Relating Religion: Essays in the Study of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4), 245-246.


40) 일레인 페이절스, 권영주 옮김, <<사탄의 탄생>> (루비박스, 2006).


41) 문명과 복음의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William R. Hutchison, Errand to the World: American Protestant Thought and Foreign Mission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chap. 1.


42)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제4장 승려 및 그 풍습에 관한 것”


43) 김상근, <<동서 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100.


44) 일본 선교를 개시한 하비에르는 일본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고 활동하였다. 반면에 2대 선교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카브랄은 청빈의 이상을 강조하며 일본 승려처럼 화려한 복장을 갖추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하비에르 노선의 계승자이자 3대 책임자인 발리나뇨는 토착화 정책을 펴며 비단옷을 입고 활동하도록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위의 세 인물의 정책적 선택은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세 단계, 즉 유사성에서의 출발-차이의 강조-차이와 유사의 전략적 활용에 각각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카브랄과 프로이스는 두 번째 단계인 차이의 강조에 위치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45) <<일본사>>에서 프로이스는 서양과 일본의 종교 건축과 종교적 공간 사용의 차이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 우리들 교회는 건물 안길이가 길고 정면의 폭이 좁다. 일본의 사원은 정면의 폭이 넓고 건물 앞쪽에서 뒤끝까지의 거리가 짧다. 2. 우리들 교회에는 합창 장소가 있으며, 사람들이 앉을 의자 또는 걸상이 있다. 승려들은 제단 앞에서 다다미에 앉아서 기도한다. …… 9. 우리들은 종을 아주 높은 탑 위에 둔다. 그들은 손이 닿을 정도의 지면 가까이 낮은 곳에 둔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제5장 사원, 성상 및 종교 신앙에 관한 것”)


46) 이러한 식의 브리콜라주 개념은 레비-스트로스의 논의에서 갖고 온 것이다. 다음을 볼 것.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안정남 옮김, <<야생의 사고>> (한길사, 1996), 70-77. 이 개념을 기독교 선교의 정황에서 일어난 혼합현상에 적용한 사례로는, 남아프리카의 선교 사례를 연구한 코마로프의 글을 볼 것. Jean Comaroff, Body of Power, Spirit of Resistanc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197-98, 250.


47)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78-9.


48) 한중일 삼국의 우란분절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김성순, <우란분절 수용에 나타난 의미의 확대와 변용>, <<종교연구>> 49(2008년, 발간 예정).


49) 안정주, “오본 풍습과 예수회의 ‘적응’ 정책”, 김태정 외, <<일본인의 삶과 종교>>(제이앤씨, 2007), 254.


50) 안정주, “오본 풍습과 예수회의 ‘적응’ 정책”, 김태정 외, <<일본인의 삶과 종교>>(제이앤씨, 2007), 255에서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재인용.


51) 선교 현장에서는 기도의 대상으로서 제단화가 요청된다. 특히 예수회의 일본 선교가 있기 얼마 전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성모, 그리고 다른 성인들의 성화들이 특히 교회 안에 유지되어야 하고, 알맞은 존경과 경배가 행해져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트렌트 공의회, 제25절” 중에서, J. Waterworth (ed. & tr.) The Canons and Decrees of the Sacred and Oecumenical Council of Trent (London: Dolman, 1848), 235.) 때문에 성상 혹은 성화의 존재가 선교에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유럽으로부터 일본까지 성화를 공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예수회에서는 예술 학교를 설립하여 ‘그려진 제단 그림’을 일본에서 직접 조달하도록 하였다. 니콜로(Giovanni Niccolo) 신부가 일본에 부임하여 일본인들에게 미술교육을 하였다. 예수회에서 교육받은 화가와 판화가의 수는 1593년 하치라오[八良尾]에 21명, 시키[志岐]에 23명, 1601년에 시키에 14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전한다. (강덕희, <<日本의 西洋畵法 受容의 발자취>> [일지사, 2004], 23.)


52) 프로이스는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기독교와 일본 불교의 차이를 논하고 있다. “5. 우리들의 성상은 대부분 그려진 제단 그림이다. 승려들의 사원에는 모든 성상이 조각상이다. 6. 우리들의 성상에는 다양한 색채를 이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상을 위부터 아래까지 금을 칠한다. …… 8. 우리의 성상은 아름답고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것은 화중에 태워지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추악하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제5장 사원, 성상 및 종교 신앙에 관한 것”)


53)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제5장 사원, 성상 및 종교 신앙에 관한 것”.


54) Gauvin Alexander Bailey, Art on the Jesuit Missions in Asia and Latin America, 1542-1773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9), 80. 미술사가 베일리(Gauvin Alexander Bailey)는 이 작품을 남아있는 일본 예수회 작품 중 가장 걸작이라고 평가한다. 금색 바탕은 무모야마 시대 회화의 유행을 반영하며, 무엇보다도 성모의 얼굴에서 높게 반달 모양을 한 눈썹, 이중 턱, 벌에 쏘인듯한 입술에서 일본 회화에서의 여성 표현 방식이 드러난다. 일본인이 현실에서 유럽 여성을 본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을 함께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일본식 재료 위에 그려진, 일본적 미에 기반한 성모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 2) 바테렌이 배에서 내리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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