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10 16:29

전도서의 지혜와 길가메시 서사시 서랍1: 문서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로 시작되는 <전도서>는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성경에서 이질적인 이 텍스트를 애호하는데서 나의 삐딱한 태도가 이미 드러난다고나 할까?) 여기서 코헬렛이라고 불리는 선생은 그것이 교리적으로 어떻게 조화되는가에 구애받지 않고 삶의 본모습을 꿰뚫으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달관으로부터 비롯한 삶의 진정한 건강함을 일깨우는 주옥같은 말씀을 해준다. 이 책은 ‘지혜 문학’에 속한다. 저자는 솔로몬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고대 서남아시아 지역과 지중해 연안에 널리 공유된 지혜들의 집적으로 보아야 한다. ‘지혜’는 삶의 보편적인 교훈을 담은 경구들이라 문화권 내에서 잘 전달되고, 또 신화와 달리 변형이 많지 않은 채로 보존되는 것 같다.
사비냑(Jean De Savignac)의 “전도서의 지혜와 길가메시 서사시”(La sagesse du Qôhéléth et l'épopée de Gilgamesh)라는 논문은 전도서가 고대 근동 지역의 다른 지혜 문학과 얼마나 상통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그리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헌들을 통해 잘 보여준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작부(酌婦) 시두리의 노래와 비교해 보여주는 부분이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불어로 된 이 논문을 내가 읽으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은데, 함께 공부하는 김민소씨가 요약해준 덕분에 즐길 수 있었다. 요약하고 글까지 제공해준 민소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전도서의 지혜와 길가메시 서사시
La sagesse du Qôhéléth et l'épopée de Gilgamesh
par Jean De Savignac

이 글은 구약의 지혜서 중 하나인 전도서(le Qôhéléth)를 이스라엘의 외적 배경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 논문으로, 저자 Savignac은 평행구절(parallelisme) 간의 비교를 통해서 전도서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첫째, 그리스의 철학개념과 둘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고대 근동의 여러 관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적 요소들이 전도서의 곳곳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남겼다고 말한다. 발제문에서는 이를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그리스적 요소
우선, Savignac는 기독교는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결합으로 생겨난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이러한 결합이 이스라엘의 지혜문학(la litterature sapientiale), 특히 전도서 안에서 뛰어나게 이루어졌고 말한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구절들을 비교, 대조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Savignac이 처음으로 제시하는 전도서 3장의 첫 15구절의 가르침의 경우가 그러하다. “지금 있는 것은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과거에도,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전도서 3:15)
여기서 저자는 전도서의 기자가 καιρος(특정한 시간)의 의미에서 ‘ēth(עת, 시간)1)을, εὖ πράττειν 의 의미로 'âsâh tôb (עשׂןת טןב, 선을 행하다)1), καλος 는 iapheh(יפה,아름다운), 사실은 κοσμος와 동의어로 쓰인 ʿolam(עןלם,영원함)1)은 αἰῷν의 뜻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형적으로 그리스 적이다. 그리스적인 독특한 시간관은 앞서 인용한 전도서의 일부분과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일부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법칙이란 인간에게 전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악한 것들, 반대로 좋은 것들을 (순환적으로) 되돌려주는 ‘시간’이 바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일부)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순환적인 시간의 흐름이 존재한다는1) 그리스의 독특한 시간관은 이 외에도 지속적으로 전도서 안에서 발견된다.
한편, 11장의 첫 구절과 같은 장의 5절 역시 그리스 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 특히 “바람(רוח)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הכל)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전도서 11:5) 여기서 ‘우주(만물)는 곧 모든 것(τὸ παν)’이라는 그리스적 표현이 발견된다. 또한 “바람(souffle)"이라는 단어 역시 πνευμα(영혼, 숨)이자, 풍요롭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Savignac이 제시한 구절을 살펴보자. 11장 8절1)의 일부분인 “kol-shebba habel (כל־שׁבא הבל / 다가올 모든 것은 헛되다)” 역시 오직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지나간 혹은 보이는 모든 것 안에는 그 어떤 진정한 실재(realite vraire)도 존재하지 않는다(παν το γιγνομενον ...... ὄντως οὐδἐποτε ὄν).”라는 보다 상세한 의미가 숨어있다.

2. 이집트적 요소
이외에도 전도서에서는 이집트적인 주제들 역시 발견된다.1) 신전에서 조용히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이집트의 종교적 당부이며, 이는 전도서를 제외하고 성서의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신전 안에서 너의 목소리를 높이지 마라. 왜냐하면 신은 침묵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1), “고요하지 않은 신전은 신의 버림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전도서 12장의 노년의 질병에 관한 묘사는 ‘프타-호텝(Ptah-Hotep)의 지혜’의 첫 구절과 파라오에게 바친 지혜서들의 문학적 용례와 상당히 유사하다.
12장 7절에서 죽음의 장소, 즉 무덤을 묘사하는 “영원히 머무르는 곳(demeure eternelle)"라는 표현 역시 이집트의 영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는 산헤립(Sennacherib)의 장례 비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 것은 다음과 같다. “잠의 왕궁, 휴식의 무덤, 앗수르의 왕이자 세계의 왕인 산헤립의 영원한 거주지

3. 고대 근동적 요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전도서는 그리스의 철학과 이집트의 종교적 개념에 영향을 받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고대 근동적 요소가 바로 그 것이다. 분명, 전도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적 심성을 간직하고 있는 셈족 전통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분명 이스라엘 이전의 고대 근동문화의 흔적이 짙게 깔려있으며, 이를 발견하는 것이 이러한 작업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작업의 시작을 연 것은 Hubert Grimme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11토판에도 나오는) 성서의 대홍수에 관한 G. Smith의 1862년 강의가 있은 지 43년 후에, Hubert는 “Babel und Koheleth-Jojakhi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Hubert는 전도서와 길가메시 서사시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뒤이어 등장한 Benno Landsberger와 Rene Labat 역시 토판의 번역을 비롯해 이러한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렇다면 Savignac이 말하는 고대 근동적 요소는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전도서 안에서 재현되었을까?

죽음은 바람과 같아 극복할 수 없는 것
전도서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habel habalim hakkol habel)'라는 구절은 그리스 격언인 “ματαιοτης ματαιοτητων και παντα ματαιοτης”, 라틴어의 “Omnia vanitas.”에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들은 모두 “모든 것이 텅 비어있으며, 망상이자 환상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와 동일한 이미지가 고대 근동 최고의 문학으로 알려져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발견된다.
“사람은 그가 온 것과 같이 사라진다(죽는다). ; 그가 바람을 따라 여행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준단 말인가?”, “인간적인 모든 것은, 수명이 정해져 있다. 무엇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예일 판본 4토판, 5)
여기서 길가메시가 사는 인간의 세상은 텅 비어있으며, 그의 운명 역시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길가메시 서사시의 ‘바람=공허함=인간의 운명’라는 도식은 ‘바람’의 이미지를 통하여 근동을 비롯한 그리스, 로마까지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죽음은 바람과 같은 것이며, 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라는 중요한 주제가 등장한다. 이는 전도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은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을 지배할 수 없다. 또한 그는 그의 죽음에 날에 대한 어떠한 힘도 지니고 있지 않다 ; 이러한 투쟁 안에서는 조금의 구원도 없다.”(8장 8절)1)
이렇듯 죽음 앞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일 뿐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좌절이 아닌, 극복의 의지였다.

② 현세의 행복 추구
위에서 살펴본 비참한 인간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대 근동인은 새로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전도서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R. Labat가 번역한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Bruno Meissener 에 의해 바그다드에서 출토된 고대 바빌로니아 토판)는 술집 여주인인 시두리(Sidouri)가 길가메시에게 전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길가메시여, 무슨 까닭으로 방황하고 있는가?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을 당신은 찾지 못할 것이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들은 인간을 위해서 죽음을 정하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영생을 보류하였다.
길가메시, 당신은 당신의 배를 채우고
밤낮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매일 기뻐하고, 밤낮없이 뛰놀고, 춤을 춰라.
당신의 옷을 깨끗이 하고, 당신의 머리를 청결히 하고, 몸을 닦으며
당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의 허리에서 즐겁도록 해주라.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이는 전도서 9장 7-10절과 평행구절을 이룬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해 아래)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것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죽음이라는 벽에 부딪혀 낙담한 인간에게 현세에서의 행복 추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이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현세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도서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경우,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그 주제가 ‘인간 사이의 우정과 형제애에 대한 찬양’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수메르 학자인 S. N. Kramer 의 연구는 이를 확장시켜주었다. 물론 이로 인해 전도서와의 온전한 비교 역시 가능해졌다. 그가 출판한 “길가메시와 산자들의 땅”이라는 제목의 수메르 작품은 총 170행의 시로, 크레이머는 이 시와 전도서 4장 12절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다. “세 겹의 줄(la corde ὰ trois fils)은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2) 후에 R. Labat 역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할만한 새로운 평행구절을 재구성하여 제시하였는데, 이 새로운 구절은 길가메시 서사시 4번째 토판 5단의 마지막과 6단의 시작 사이에, 그리고 7번째 토판의 2단에 들어간다.
만약 사람이 혼자라면, 그는 이길 수 없지만 둘이라면 이길 수 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힘에 쓰러질 것이다. ; 친구, 그들은 결합하였다. 깎아지른 절벽은 혼자서 오를 수 없다. 그러나 둘이서 도우면 할 수 있다. 세 겹의 줄은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 두 마리의 어린 사자들은 그들의 아버지보다도 힘이 세다.”3)
친구와의 우정 이외에도 많은 자식을 낳는 것, 전장에서 명예롭게 싸우는 것은 현세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또 다른 요소가 된다. 전도서 11장의 첫머리와 길가메시 서사시 12토판의 평행구절을 보면, 아이를 많이 낳고, 전투에서 명예롭게 싸우는 것을 통해 얻은 진정한 행복과 그에 대한 찬양이 나온다.
“너는 명예롭게 죽은 이를 본적이 있냐? 네, 봤습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침대에 누워 편히 쉬고, 깨끗한 물을 마십니다. / 그럼 너는 10명의 아들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있냐? 네 봤습니다. 그것은(아이가 많다는 것은) 쟁기질을 하는 것과 같아 그의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합니다.” (12토판 중)
이와 같이 어찌 보면 체념에 빠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대 근동인은 자신들의 문학을 통하여 삶의 이유가 되는 행복을 구현해나갔다. 특히 우정과 형제애, 자식에 대한 애정 등을 가지는 것이 현세를 살아가는 지혜이자 진정한 행복의 필수조건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이러한 지혜는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도 영향을 주어, 전도서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도서는 결코 절망적인 기록이 아니었다. 오히려 겸손하고, 지적이며,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도서의 성격이 단순히 이스라엘 문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근동 등 다양한 주변문화의 영향으로 형성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1) 표준새번역 참고, 전도서 3:1)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2) 전도서 3:12)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3) 전도서 3:14)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4) 전도서 3:15)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과거를 다시 불러오신다).
7) P.Humbert, Sources egyptiennes de la litterature sapientiale d'Israel , [Neu-chatel, 1929]
8) 이집트의 Chester Beatty papyrus에서 발견된 구절.
1) 전도서 8:8) 바람을 다스려 그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자기가 죽을 날을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전쟁이 일어나면 벗어날 사람이 없듯이, 악은 행악자를 놓아 주지 않는다.
2) 전도서 4:12)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10) 이것의 평행구절은 전도서 9:9-12이다)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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